「전장기자」의 영광스런 기록
 
 
양헌굉(楊憲宏)(원로 언론인)

1989년 주립희의 책 「한강변(漢江變)」 출판을 위한 서문을 작성할 때 저는 매우 자신이 있었고, 「전장기자(戰地記者)」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라고 적었었다. 그의 미래는 이미 민주 자유 인권 법치를 위해 계속 분투하는 운명으로 정해져있었다.

제가 주립희를 「전장기자」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도 과장되어 있지 않으며, 한국에서 취재를 하던 몇 년간 우리는 매일 저녁 통화를 했다. 당시 저는 타이페이에서 해외 주재 특파원들이 매일 보내는 원고를 확인해서 주제 설정 및 편집을 해서 특파원의 기사가 타이틀 또는 최소 3번째 지면 헤드라인으로 실을 수 있게 하는 업무를 했다. (당시 3번째까지의 지면이 신문에서 가장 중요했음)
  
제가 「한강변(漢江變)」의 서문 중에 말했던 「우리는 뉴스를 위해서 매일 통화를 했다. 주립희는 취재 자료의 배경 묘사하거나 정보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대만어로 바꾸어 말하였는데 이는 도청되고 있다고 느꼈을 때 하는 우리만의 약속된 암호였다. 」 그는 대만어로 말하면 한국 도청 공작원이 못 알아듣는다고 말했다.
  
주립희는 한국에 있을 때 매우 부지런하게 일했으며, 자주 신원 미상의 인물에게 미행당했다. 스파이 소설과 같은 이야기는 우리가 같은 신문사에서 일했을 때 가장 기억이 남는 일이다. 상술한 내용은 모두 실제 발생한 일이다. 당시 제가 각국의 특파원들과 연락할 때 특파원들의 대부분은 원고가 언제 들어올 수 있는지, 글자 숫자 제한 등의 기술상의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와의 통화는 모두 특종 보도라서 긴장되었다.
  
주립희의 뉴스는 매우 특별해서 저는 한국에 직접 방문해서 상황을 확인하기로 했고 그와 함께 학생 운동과 전투 경찰의 진압 현장을 방문하였다. 그는 헬멧과 방독면을 착용하고 현장을 누비는 기자였으며, 현장의 충돌 과정을 이야기할 때는 어떠한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 그가 한국 경찰이 폭력적으로 학생 운동을 진합 하는 현장을 취재했을 당시 전투 경찰이 발포한 최루탄이 팔에 맞았으며 최루탄이 터지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팔에 큰 상처를 입을뻔했다. 그는 이 최루탄을 집에 가지고 가서 거실 텔레비전 위에 올려두기까지 했다.
  
주립희가 광주, 대구의 시위를 취재하다가 팔꿈치에 돌을 맞아 크게 다쳐 카메라를 땅에 떨어뜨린 적도 있으며, 방독면까지 구매하면서 계속 취재를 진행했다. 이런 광경은 모두 실제 전장에서 생활하는 사람 같았다. 당시 신문사의 전송 설비는 매우 원시적이어서 문자만 전하고 사진은 전달할 수 없어서 그도 당일 취재자료를 글로 작성하고, 사진은 국제 통신사를 통해서 보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장 기록을 촬영하겠다고 고집했고, 그의 직업정신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당시 한국 학생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피눈물의 기록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주립희는 스스로 주재국을 「하나의 학문(一門學問)」으로 삼고 취재를 했다. 그가 한국 특파원으로 있는 몇 년 동안 한국 정부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한국에 대한 보도는 매우 진실되었으며 본국의 외교부에 대해서도 인정사정없었으며 대만의 한국 주재 외교관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가 1988년 대만으로 돌아왔을 때, 여러 관련 한국 인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1988년 1월 귀국해서 우리는 함께 신문 발행 금지의 계엄령 해제 이후 생긴 신문사로 자리를 옮겼다. 1991년 1월 제1차 걸프전쟁이 발생하자 신문사의 상사가 「중동으로 가자!」 라고 했으나 어느 나라에 갈 것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당시 신문사에는 이미 5명의 기자가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키프로스 등 국가에 있었다.(이라크와 쿠웨이트는 기자가 들어오지 하지 못하게 함) 주립희는 본인의 취재 감각에 따라 이스라엘이 이라크의 후세인 대통령을 제1 공격 목표로 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1월 17일 유엔의 이라크 제재 결의안이 통과 되자마자 타이페이에서 출발하여 싱가포르를 거쳐 비자를 발급받은 후 카이로까지 날아간 뒤 육로로 수에즈 운하와 시나이 사막을 거쳐 이스라엘의 수도 텔아비브로 직행했다.
  
주립희는 이스라엘과 미군의 프레스센터가 텔아비브 힐튼호텔에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아갔으며, 이곳은 최신 전쟁의 상황을 얻고 각국 기자와 정보를 교환하기 좋은 최적의 장소였다. 그는 주저 없이 힐튼 호텔에 들어갔으며, 이스라엘에 처음으로 도착한 대만 기자였다. 당시 전장 기자의 열정이 다시 끓어올랐으며, 그가 한국에서 사용하던 방독면이 다시 유용하게 쓰였다.
  
주립희는 이 전쟁터의 취재 경험을 회고하면서 인생 처음으로 「생사가 걸린(生死交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한 번은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이 힐튼 호텔 앞 1 백 미터에 떨어졌으며 그는 프레스센터의 임시로 만든 밀폐된 대피실에서 4번의 굉음을 들었고 20층의 호텔 빌딩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이번에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마음속의 긴장과 두려움은 주립희 자신의 37년 인생을 돌아보게 했으며, 무엇을 이루었는지, 어떤 소원을 아직 못 이루었는지, 부모님과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필연적으로 생각남과 동시에 호텔 전체가 폭파되고 400여 명의 각국 기자들이 동시에 사망하여 보도자료를 낼 수 없는 것도 큰 뉴스인데라고 생각되면서 마음이 살짝 놓였다고 한다. 30분간의 죽음을 앞둔 생사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살아나면서 그의 인생관을 바꾸어 놓았다.
  
이스라엘 전쟁 취재는 실제 전장의 최전선의 생과 사를 볼 수 없었으며, 미사일 공격을 피한 이후 피해 지역의 폐허로 가서 추모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이 종료된 후 주립희는 이스라엘 주변국가인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그리고 멀리 튀니지의 수도 튀니지를 방문했으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총사령 야세르 아라파트까지 취재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중국에서 게릴라전 전술을 배웠고 베이징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대만 기자의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층층으로 막힌 관문을 뚫고 아라파트의 외교 고문 샤리프를 방문했다. 외눈의 샤리프 책상 옆에는 자객의 기습을 막기 위해 소형 돌격총이 있었다. 이는 걸프전쟁 이후 가장 잊을 수 없는 취재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주립희의 자료 정리 솜씨는 일품이었고, 그가 손으로 작성한 원고도 다시 옮겨 쓴 것처럼 가지런했다. 오늘 많은 기자들이 본인이 작성하거나 필사한 기사는 「하루 중점 없이 나열하는 서술처럼의 기장부 (一日流水帳)」로 보존 가치가 없으나 그는 본인이 작성한 매 문장을 모두 소중히 하며 글을 잘 작성했는지, 또는 다른 사람들이 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신경 쓴다. 자신의 원고를 소중히 하는 것은 기자의 책임 윤리 최소한의 요구이며 본인이 수년 동안 기자 생활로 작성한 문장을 정리하여 책으로 만들어 시대의 비판을 받을 수 있으며, 기자의 직업은 역사를 구현하는 실질적 근거가 되기도 한다. 지금 그는 개인 자료 데이터 중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영상을 찾아내서 다시 한번 우리에게 고전적인 인문 가치를 믿는 문인의 풍채와 품격을 알게 해준다.

고(故) 장계고(張繼高) 선배 언론인은 「기자는 본인의 중력(重力 gravity) 이 있다」고 자주 말했다. 장 선배님의 말을 지금의 우리는 잘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의 많은 저널리스트들은 자기 언론사의 과장한 홍보 선전에 의해 목소리도 크고 명성도 중천에 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세계화의 디지털 지식 베이스는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있다. 주립희의 「중력(重力)」특히 한국 문제에 있어서는 대만 국내의 전문가들조차 그에게 필적하기 어려우며, 한국 민주 항쟁 역사의 경우 주립희의 영상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전장 기자」 주립희는 당시 한국에서 7년 목숨과 바 구구절절한 「고통스러운 아시아(痛苦的亞洲)」의 피눈물을 기억하는데 그치지 않고, 후에 행동으로 전환하여 변화 중인 대만에 뛰어들어 민주 운동의 신념자가 되었다. 그와 함께 어깨를 나란하고 싸웠으며 지금은 각자의 운명을 걷고 있는 오랜 친구에게 이 문장과 영상은 우리의 눈 보라치는 어두운 과거이며, 상처투성이의 영광스러운 기록이다.

주립희선생님은 2020.6.14~9.27. 타이베이시 난하이로 "228 국가 기념관"에서 "1987 인민각성: 한국 민주화운동 목격 사진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