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1979~1987 레짐
 
 
대만의 ”1979~1987 레짐”
                         
최정기 교수가 발표 중 언급한 「1979~1987레짐」의 개념은 대만인인 저에게 깊은 공감을 주었습니다. 대만과 한국 양국의 regime 기간 경험은 의외로 닮아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격동기와 수난기를 거쳐 다시 항쟁 기간에 이르렀으며, 시민들이 민주화라는 과실을 쟁취하기까지 매우 고생스러운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최후에 승리를 얻었으며 저는 이러한 양국의 상황을 「고난의 형제(難兄難弟)」라는 단어로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하게 당시 대만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1978년 12월 16일 밤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Jimmy Carter)가 1979년 1월 1일부로 중화 인민 공과국과 국교 수립을 선포하였고, 대만과 단교 하였습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지면서 대만 사람들은 공황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미국과 단교는 부자 세습의 독재자 장경국(蔣經國) 총통이 집권한 이래 가장 큰 좌절과 실패였습니다. 장경국은 국가 긴급 상황(당시 30년의 계엄령이 실시되고 있었음)을 선포하였고 당해 말에 진행 예정이던 중앙 민의 대표(中央民意代表) 선거를 중단시켰습니다.

단교와 일련의 사건이 발생하기 전 1978년 8월 전 고웅(高雄) 현장 여등발(余登發)와 아들 여서언(余瑞言)이 「오태안 간첩 사건 (匪諜吳泰安事件)」의 혐의를 받아 정보 치안부서에 체포되었습니다. 이들은 「지비불보(知匪不報, 간첩을 알고 있음에도 신고하지 않았음)」와 「위비선전(為匪宣傳, 간첩 위해 홍보」이라는 죄목으로 중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사회의 불만을 발생하였고, 「당외인사(黨外人士, 당시 계엄령 아래서 새로운 정당을 조직할 수 없었고 국민당 이외의 외부 재야 세력을 당외인사로 불렀음)」의 반발을 샀으며, 국민당 정부의 박해에 대한 항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외 세력은 국민당 정부가 여등발을 체포한 것은 당외 인사들이 전국적인 연대 활동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국민당 정부의 여등발 부자 체포 사건은 당외 세력의 결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당시 이름있던 반대 운동 세력의 리더 허신량(許信良), 황신개(黃信介), 진국(陳菊), 장준굉(張俊宏) 등은 1979년 1월 22일 여등발의 고향 교두(橋頭)향에서 여등발 부자의 석방을 요구하는 항의 시위를 진행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대만 계엄 30년이래 가장 큰 반정부 정치 시위 활동이었습니다.

교두에서 시위를 총괄했던 사람은 시명덕(施明德)이었으며, 시위를 통해 각지의 당외 정치 청년 엘리트들을 모아 하나의 조직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 조직은 국민당에 정면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대항했으며, 이미 정당의 초기 형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후에 국민당 정부는 항쟁에 참여했던 민선 도원(桃園) 현장 허신량에게 직무 정지 2년 처분을 내렸고, 이러한 국민당의 움직임은 다시 한번 당외 세력을 격분시켰습니다. 당해 4월 여등발은 유기징역 8년의 무거운 판결을 받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사건에 대해서는 장경국 총통이 미국에 버려진 정치 실패를 경험한 이후에 대만 사람을 대상으로 보복행위를 자행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만의 전해지는 말 중에 [집안의 문을 닫고 아이를 때린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당외 인사들은 1979년 8월 《미려도잡지(美麗島雜誌)》를 창간 했으며, (「미려도(美麗島)」라는 단어는 포르투갈의 Ilha formosa「아름다운 섬(美麗之島)」에서 왔으며, Formosa는 이후 대만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으로 쓰이게 됨) 미려도잡지는 대만 전체 재야세력을 연대하였으며, 전국 각지 60명이 넘는 당외 인사가 사무위원을 맡았고, 각지에 지사를 설립하여 실제로는 이미 「준정당(準政黨)」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려도잡지(월간)은 발행 4기만에 미려도 사건으로 인해 폐간되었습니다.

1979년 1월의 「교두 사건(橋頭事件)」과 4월의 여등발의 판결은 12월의 고웅 「미려도 사건(美麗島事件)」의 발화점이었으며, 이는 「부마민주 항쟁(釜馬民主抗爭)」이 10.26 박정희 18년 독재를 붕괴시킨 「사소한 것일지라도 한도를 넘으면 예상을 뛰어넘는 효과를 가져온다( the straw that breaks the camel's back)」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양국의 「1979~1987 레짐」은 이렇게 서막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미려도 사건은 1979년 12월 10일 발생하였으며, 당외 인사들이 「세계 인권일(世界人權日)」을 명목으로 고웅의 미려도 잡지사 앞에서 강연 활동을 개최하였습니다. 이후 군중들의 참여가 입구 밖 회전 교차로에 도달하게 되면서 삼엄한 경비를 하던 헌병 진압 경찰과 대치하였습니다. 대치의 와중에 군중 안에 잠입해있던 이백여 명의 사복 경찰 헌병이 먼저 경찰을 공격하였고, 헌병 경찰은 군중들이 폭동을 시작했다는 이유로 강력한 진압을 전개하였습니다. 진압에 분노한 군중들도 강력하게 반격하였고 나무 막대기 또는 쇠 파이프로 헌병 경찰을 공격했습니다. 미려도 사건은 후에 「미폭선진, 진이후폭(未暴先鎮,鎮而後暴 먼저 진압하고, 폭동으로 만드는「先鎮壓、後暴動」)」 사건이었습니다. 국민당 정부의 「먼저 진압하고, 폭동으로 만드는 (未暴先鎮)」 진압 수법은 이후에 전두환이 배워서 광주 민주화 항쟁을 진압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양국의 독재 정권은 진압하는 수법까지 모두 함께 학습하였으며 진압의 수법 또한 매우 비열합니다.

518 광주 민주 항쟁과 같이 정부의 어용 매체에서는 미려도 사건으로 총 183명의 헌병 경찰이 다쳤으며, 시민의 경우 한 명도 다치지 않았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정부 당국은 유명한 스타를 동원하여 다친 헌병 경찰을 위문하게 하였으며, 미려도 사건을 전개한 당외 인사들은 모두 폭도의 오명을 썼고, 8명의 주범은 모두 「폭력 반란죄 (暴力叛亂罪)」의 군법으로 기소되었습니다. 그러나 해외 대만 교민의 연서 서명 운동과 미국 국무성의 압력 아래서 장경국 정권은 주요 혐의자에 대해 사형을 판결하지 않겠다고 동의했으며 동시에 군사 재판도 언론 매체에서 취재할 수 있게 공개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당해 3월 중 경미(景美) 군사 법정에서 재판이 시작되기 전 1980년 2월 28일 대만 사회를 놀라게 한 「림 씨 자택 살인사건(林宅血案)」이 발생하였습니다. 미려도 사건 수형자 중 한 명인 림의웅(林義雄)이 심문 조사 중 「가장 비 협조적(最不合作)」이었기 때문에 청부살인업자를 이용하여 점심시간에 림의웅의 집에 숨어들어가서 림의웅의 모친과 쌍둥이 딸을 살해하였으며, 장녀는 중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림의웅의 집은 정보 당국에서 24시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청부살인업자가 어떻게 숨어 들어갔는지 의문점이 많았으며, 일반 대중들은 정보 당국의 특수 요원(공작원)이 그랬을 가능성에 대해서 의심하였습니다.

대만인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림 씨 자택 살인사건은 제2의 「228사건(二二八事件)」으로 민감도가 매우 높은 2월 28일이라는 날짜와 미려도 사건의 수형자를 대상으로 한 일가족 살인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정치적 음모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은 40년 가까이 시간이 지났으나 여전히 사건을 해결할 방법이 없으며 「의문사 사건」이 되었습니다. 장경국은 미국과 대만의 단교 이후에 일가를 몰살시키는 살인 사건으로 공포 정치를 수행하였습니다.

림 씨 자택 일가족 살인 사건 발생 다음해인 1981년 7월 진문성(陳文成) 살인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서울대학교 법학과 최종길 교수의 「자살을 당한(被自殺)」사건의 복제판입니다. 1981년 5월 20일 미국 카네기멜론대학교 통계 학과 조교수 진문성의 가족은 친지를 방문하기 위해 미국에서 대만으로 왔습니다. 7월 2일 3명의 경비 총사령부 공작원이 진문성을 데리고 가서 회담하기로 했습니다. 다음날 새벽 경비 총사령부에서 죽였는지는 불분명하나 대만대학교 대학원 도서관 옆에서 진문성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국민당 정부는 그가 처벌이 두려워서 스스로 자살한 것이라고 발표하였으나, 진문성의 가족과 친구들은 정부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대만에 방문하여 시체를 검시한 미국 법의학 생리학자 및 카네기멜론대학교의 대학교수 또한 그가 살해당한 사건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다시 한번 대만 사회를 뒤흔들었으며, 림 씨 자택 살인 사건과 마찬가지로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사건입니다. 한국의 「보안 사령부(保安司令部)」와 대만의 「경비 총사령부(警備總司令部)」는 온갖 못된 짓을 하는 악의 원흉이었습니다. 두 부서는 인권을 유린하고, 신문을 검열하고, 당외 잡지의 발간을 금지시키고, 금서를 지정하고 더 나아가 의문사 등의 사건과 모두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림 씨 자택 살인 사건과 진문성 살인사건은 대만 사람들로 하여금 장경국 독재 정권에 대해 매우 큰 반감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중국어 성어 중에 「나쁜 짓을 많이 하면 반드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게 된다. (多行不義,必自斃)」라는 정의롭지 않은 나쁜 일을 많이 하면 스스로를 죽게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1984년 10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미국 국적의 화교 작가 강남(江南)이 《장경국 전(蔣經國傳)》을 작성하여 장경국을 비판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대만 정보 당국은 강남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국방부 「군사 정보국(軍事情報局)」(한국의 「기무사(機務司)」와 비슷)의 국장이 「죽연방(竹聯幫)」(Bamboo Gang,조직폭력배)의 청부살인업자를 고용하였고, 청부살인업자는 바다를 건너 미국에 가서 강남의 집 문 앞에서 강남을 총살하였습니다.

강남 살인 사건은 미국의 주권을 명확하게 침범한 사건으로, 미국 내에서 미국인인 강남이 살해당했습니다. 이는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 사건에서 배웠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중앙정보부의 간부가 일본 주권을 침해하여 김대중을 납치하였으며, 강남 살인 사건도 이와 비슷합니다. 박정희와 장경국의 독재 악행은 정권의 수하인 정보 당국까지 거리낌 없이 나쁜 짓을 하게끔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강남 살인사건은 최종적으로 장경국 정권이 정보 당국을 개혁하게 만들었습니다. 강남 살인 사건에 대해서 미국 당국이 격노하였으며 장경국 정권 정보기관의 개혁을 강력하게 압박했으며, 개혁하지 않을 경우 대만에 대해 제재를 가하겠다고까지 언급하였습니다.

장경국이 총통이 된 것은 대만의 민의가 아니었으며, 1948년 중국에서 뽑힌 국민 대회 대표의 대표들이 치른「간접선거」를 통해서 총통이 되었습니다. 장경국은 대만의 민의를 대표할 수 없었으나 장 씨 부자의 독재 왕조의 법통을 유지하기 위해서 국민대표는 영원토록 새로 선발이 필요 하지 않았습니다. 「만년국회(萬年國會)」로 불리는 일은 세계적으로도 기이한 일이 대만에서 지속 되었습니다.

강남 살인 사건 이후 장경국은 여러 압박으로 정보기관을 정돈해야 했으며, 조폭 파벌(조직폭력배)을 강력하게 소탕하였습니다. 또 둘째 아들 장효무(蔣孝武)를 강남 사건의 속죄양으로 만들어 싱가포르로 유배 보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만 사람은 장막 뒤의 진짜 사주자는 장경국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강남 살인사건 이후 대만 외교부는 195만 달러를 강남의 미망인에게 전달하여 사건을 종결했으나, 국내외에서 장경국 정권의 통치 정당성은 상실되었으며, 전 국민으로부터 강한 질의를 받게 되었습니다. 반정부의 사회 운동은 계엄의 금지 명령에 개의치 않고 계속 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환경 보호(반 오염) 운동, 농민 운동, 노동 운동 등 들판을 태우는 불씨와 같이 전 대만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1985년 ~ 1987년의 한국과 닮아있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40년 동안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가족을 만날 수도 없었던 퇴역 노병들은 「집이 그립다.(想家)」는 망토를 두르고 총통부 앞에서 시위를 하였습니다. 저는 장경국이 노병들의 시위 장면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당뇨병이 심각해진 장경국은 사회 역량이 폭발하여 이미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986년 9월 29일 계엄령의 「당을 조직하면 안 됨(黨禁)」이라는 금지 명령을 무시하고 민주진보당(民主進步黨)이 원산(圓山) 호텔에서 정식으로 창립되었습니다. 창당 인원들은 모두 강제적으로 체포되는 것을 걱정하였으나 대만의 일당 독재 40년의 국민당에 대항해야 한다는 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장경국 등은 민진당의 창립을 방임하였으며, 그는 「잡아드려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抓人解決不了問題!)」는 말을 하면서 민진당의 존재를 묵인하였고, 1987년 7월 15일 장장 38년의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긴 계엄령의 해제를 선포하였습니다.

대만의 715 계엄 해제는 한국의 「6월 항쟁(六月抗爭)」과 동일한 시민들의 「아래서부터 위로 (由下而上)」의 가두 항쟁으로 촉발되었습니다. “People’s Power”의 압력으로 권력자가 어쩔 수 없이 민의에 투항하였으며 전면적으로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장경국 정권은 1989년 동구 공산당 진영 국가가 시민들에게 전복되는 것을 마주 했으며, 독재자가 살해당하는 동일한 처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민주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 (民主之樹是飲血長大的)」라고 말합니다. 1979년 ~ 1987년 레짐 전후의 9년은 한국과 대만 모두「민주의 나무(民主之樹)」가 자라나는 시간이었습니다. 비록 우리 양국의 민주는 아직 젊기에 미성숙할지는 모르겠지만, 더 많이 배우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민주의 길에서 우리는 후퇴해서는 안 되며, 함께 손을 잡고 노력하여 유교 문화권에서 더 심화되고 견고한 민주주의 문화를 만들었듯이 「민주 후진 국가 (後進民主國家)」의 학습 패러다임이 됩시다.

이 글은 2019.10.17.부산 베스코에서 거행한 "부마민주항쟁 40주년기념 국제학술대회 발표한 토론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