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정명을 위한 첫걸음
 
 
'제주 4·3' 정명을 위한 첫걸음

2018년 4월 4일 제주사람의 발원지인 삼성혈에서 우연히 <순이 삼촌> 저자인 현기영 작가를 만났고 같은 날 저녁 제주 4·3 70주년 기념 '특별공로상' 수여식 만찬 자리에서 또 만나게 되었다. 2008년 제주에서 있었던 잠깐의 만남 이후 10년 만이다. 이번에 그 분과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야 현기영 작가의 명작 <순이 삼촌>이 대만에서 중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는데 제목이 <순이 삼촌>이 아니라 <도령마루의 까마귀>로 바뀐 미흡함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작가님은 비록 가볍게 말씀하셨지만 어렴풋이 불쾌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제주 출신으로는 최초의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대만에 상응하는 기관이 없지만‘국가문예재단’이사장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을 역임한 현기영 작가는 사실 한국 문단에서 그분을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다. 2018년 제주4·3 70주년 추모행사 자리에서 현기영 작가는 문재인 대통령보다 앞서 단상에 올라 자신의 시를 낭독하였다. 이를 통해 그분이 존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었다. 2019년 '제주4·3평화재단'이 '제주4·3평화상'을 현기영 작가에게 수여한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현기영 작가의 소설집 <순이 삼촌>이 아니었다면 제주도에서 이러한 끔찍한 대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독재 정권에 의해 장기간 발행 금지되었고 되레 일본어로 번역되어 재일 제주 교민들의 관심을 끌고 일본 문학계와 학술학계의 공감을 자아내며 심도 있는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1987년 한국 민주화 실현 후 <순이 삼촌>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2018년 4월 제주에서 돌아온 후, 나는 228 사건기념재단의 고위층 관계자들과 몇 차례 회의를 하는 과정에서 현기영 작가가 염두하고 있는 점에 대해 이야기하며 <순이 삼촌>의 정명이 이루어지길 바랬다. 몇 차례의 검토 끝에 <순이 삼촌>으로 정명 된 소설집이 나오게 되었다. 이는 대만 228과 제주4·3이 협력 교류 각서를 체결한 지 12년 만에 이룬 가장 큰 성과일 것이다. 대만-한국 인권단체간 교류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필자 또한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제주 4·3과의 인연을 돌이켜 보면 2007년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 해는 228대학살 60주년이었고, 나는 228재단을 대신하여 한국의 있는 세 개의 인권단체를 초청했다. 내빈 중에는 광주 5·18기념재단 이사와 제주4·3연구소 소장을 겸임하고 있는 이규배 교수가 있었다. 당시 나는 제주 4·3 대학살에 대한 인식이 깊지 않았고 그저 한국 역사교과서와 한국 지인들로부터 얻은 간단한 지식과 자료 뿐이었다. 1985년 한국 정부의 문화공보부(당시 대만의 '신문국'과 비슷한 기구)가 주한 외신 기자들을 제주도로 초청했을 때 까지만 해도 '제주4·3'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었고, 공식 담당 수행원도 당연히 알려주지 않았다. 며칠간 이규배 교수와 함께 지내면서 4·3 대학살에 대한 설명을 듣고서야 비로소 이 참사에 대해 더 많은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규배 교수는 대만의 228사건을 알게 된 후, 한국과 대만에 이런 끔찍한 대학살이라는 비극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이 불가사의하다며 진지하게 비교 연구를 하기도 했다. 이 교수는 대만을 떠나기 전 지인들에게 대만 228은 제주4·3의 ‘형’이다. 그 이유는 하루 전에 태어났기 때문이라며 (1947.2.28 vs. 1947.3.1) 웃음을 남겼다.

인권유린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먼저 일어났다는 이유로‘형’이 되었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다 보니 모두들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규배 교수는 환송만찬에서 제주4·3연구소가 228재단과 MOU를 체결하고 교류협력을 활성화하자고 먼저 제안했고, 광주의 5·18기념재단도 기꺼이 MOU를 체결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2007년 5월 중순, 228 재단의 이사장 등 일행이 한국을 방문하면서 제주와 광주에서 두 인권단체와 공식 MOU를 체결하여 228 세계화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부터 소통과 교류를 통해 돈독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인권단체들 간의 교류가 이처럼 단번에 이뤄진 것은 한국인과 교류한 지 30여 년 만에 처음이었다. 나는 마치 남녀 간의 ‘불타는 사랑’인 것 같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아직 말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할 건지 이미 알고 있고, 심지어 대신 말해준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고난을 겪었고, 또 너무도 많은 유사성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통의 가치관과 사고방식, 그리고 공통된 민주언어, 인권언어로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8년 228 재단에서 국제학술세미나를 개최할 때 이규배 소장의 후임인 이은주 소장을 초청하였다. 그날 발표한 주제는 ‘제주 4·3의 정명’이었다. 이 발표를 통해 제주4·3의 정명이 여전히 논란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건'이란 표현은 중립적인 의미를 가지며 제주4·3은 '학살'인지, '항쟁'인지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사건의 배후에 너무 많은 진실이 묻혀 있어 제주도민들은 '제주 4·3사건'이라는 용어를 받아들일 수 없어 '제주4·3'이라는 말만 쓰며 제주 4·3의 정명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은주 소장의 방문을 계기로 2·28재단은 적극적으로 교류를 증진하고자 하는 뜻을 보여주면서 제주 4·3의 대표적인 작가 현기영 선생의 소설집 <순이 삼촌>의 출간을 돕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2009년 출판사는 소설집 중에 한 편인 "도령마루의 까마귀"를 책명으로 잘못 선택하여 원래의 책의 취지를 잃었다.) 지금 여러분의 손에 쥔 건 새로운 버전이다. 10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작가 현기영 소설집의 정명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008년, 제주 4·3 60주년을 맞이하여 2·28재단 진금황 이사장, 류조원 처장, 국사관 고 장염헌 관장, 이승웅 변호사와 나는 학술 세미나와 추모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우리 일행 가운데에는 두 분의 정무장관이 있었는데 직급이 가장 높은 내빈이었다. 나도 주최측의 요청으로 학술 세미나에 참석한 외국내빈을 대표하여 한국어로 축사를 하게 되었다. 대만대표단은 이 성대한 행사에서 높은 예우를 받았다.

2년동안 한국의 몇몇 인권단체와 활발한 교류를 진행하였고 교류범위를 확대하기 위해 나는 제1회 대만-한국 인권포럼을 마련하여 5개(국가인권위원회,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5·18기념재단, 제주4·3평화재단)의 한국인권단체 대표자를 초청하였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스승인 송기인 신부도 귀빈으로 참석하여 기조연설을 했다. 이것은 대만-한국 인권 교류에 전례없는 성황이었다.

대만에서 열린 이 포럼은 앞으로 매년 번갈아 가며 양국의 각 도시에서 열릴 것을 기대했지만 두 나라가 동시에 정권이 교체되며 보수파 출신인 대통령이 국정을 운영하게 되면서 이명박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한국인권단체에 대한 탄압, 예산 삭감, 조직 축소 등으로 인권단체들이 힘겨운 상황에 빠져 있는 가운데 인권포럼 속개에도 난색을 표했다. 대만-한국인권포럼은 딱 한번 열리고 끝을 맺게 되었다. 저절로 주먹을 쥐게 된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2·28과 제주 4·3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있다. 제주4·3평화 재단 이문교 전 이사장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2016년에 228국가기념관에서‘어둠에서 빛으로:제주4·3 사진전'을 개최하였고, 2017년에는 가오슝시립역사박물관에서도 한 번 더 개최했다. 그리고 제주 4·3평화기념관은 가오슝의 진국 시장 앞에서 가오슝시립역사박물관과 교류협력각서를 체결했다. 당시 이문교 이사장은 대만에 감사하다며 대만은 제주4·3 세계화의 첫 단추라고 말했다.

2018년 제주 4·3 70주년을 맞아 대만에서는 2·28 사건기념재단 쉐화위안 이사장, 림리채 이사와 양진륭 집행장 외에, 가오슝시 교육국 판순록 국장이 이끄는 가오슝의 인권 교장선생과 학생들을 포함한 총 18명이 4·3기념행사에 참가했다. 대만은 제주 4·3 기념행사에 가장 많이 참여한 국가이기도 하다.

타이베이 시 문화국 산하의 타이베이 2·28 기념관에서 2019년 11월 8일에 개최할 ‘2·28 국제 인권특별전: 제주 4·3사건’은 과거 228국가기념관과 가오슝시립역사박물관에서 했던 전시에 이어 반 년간 전시될 예정이다. 나도 타이베이2·28기념관의 전시 자문회의에 참여했는데 지방 정부 산하 타이베이 2·28기념관에서까지 제주 4·3을 전시하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 대만에서 제주4·3을 바로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놀랍고도 기뻤다.

타이베이 2·28기념관 특별전시를 위해서도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을 다시 정명해서 재발간 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이 소설집의 중국어 버전은 국립정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장개종 전 교수가 심혈을 기울여 육지 사람들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제주 사투리까지 충실히 번역한 역작이다. 이런 고심은 번역 일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체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의 추천자이며 중국어 버전의 첫 번째 독자로 오늘 장개종 교수의 번역 성과를 읽으며 그저 감복할 따름이다.

<순이 삼촌>을 정명하고 재발간 하는 과정에 지지와 후원을 해준 2·28 재단에 감사인사를 드린다. 10여 년 간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우리는 대만의 인권외교를 위해 힘을 보태 왔다. 제주 4·3과의 교류협력을 통해 보여준 성과는 인권보장을 이루는 데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鄰。덕이 있으면 따르는 사람이 있으므로 외롭지 않다)’임을 입증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올리려 한다. 대만 사람 제주도를 여행할 때는 카지노에만 연연하지 말고, 좋은 산과 물, 좋은 공기만을 즐기지 말고, 제주도의 역사와 문화에도 관심을 기울여 이 섬에서 벌어졌던 비극적인 학살로 인해 피범벅이 되어 흐르는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그래야 당신의 제주 여행이 심도 있고 풍성해질 것이다.

주립희
지한문화협회 대표
2·28사건기념기금회 전 이사



(이 글은 "순이삼촌" 중문판 재판의 서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