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記憶的恢復——從1987看2016
 
 
歷史記憶的恢復——從1987看2016

朱立熙(台灣「知韓文化協會」執行長、1985~88「聯合報」駐漢城特派員)


看到11月首爾兩場超過百萬人的大規模燭光示威之後,我實在難掩澎湃與激動的心情,真想再回到光化門示威現場,跟群眾一起呼吸、一起吶喊、一起高唱、一起衝撞,媒體人的熱血又溢滿我的全身。只不過現在身分不同、時間也不許可,我只能在台北的教室、在電視上、或在演講台上,跟學生與觀眾分析韓國的情勢,他們從媒體上已得知最新的發展狀況,我則替他們把歷史背景串連起來,聽得他們興味盎然,甚至目瞪口呆。

拜朴槿惠的「閨密干政」(意指女性閨房密友介入政治,「秘線實勢」的台灣用語)事件之賜,這一個月來,我在台灣成了媒體紅人,有接不完的媒體採訪或電視談話性節目的出演,以及大學社團特講的邀請,連新加坡國營電視台都兩度訪問了我。

相較於四年前朴槿惠當選那一天,台灣媒體都跟韓國人一起歡呼韓國女總統的誕生,我卻預言「這是獨裁者的復辟,是韓國悲劇的開始」,除了台灣的「公共電視」(Public TV Service)之外,沒有一家主流媒體理會我,那種無助的孤獨感,讓我非常悲傷。四年之後「朴槿惠門」爆發,學生跟觀眾們都說:「朱老師真是先知啊」,沒錯,大家不是常說「先知總是孤獨的」嗎?哈哈!
  
做為1980年代中半韓國民主化運動的見證者,1987年「六月抗爭」到最高潮的「610泛國民運動本部」成立那一天的下午六時,我在現首爾市議會前的路邊,看到每一台經過的汽車都猛按喇叭,同時發出最高的音量來表達對軍事獨裁的不滿,以及對全民抗爭的支持,那種全民憤怒的聲音,至今仍縈繞在我的耳際,當時我也跟韓國人民一樣熱淚盈眶。
  
那天下午稍早,我先參加了在獎忠體育館舉行的執政黨盧泰愚候選人的提名大會,散場後走出體育館回到市中心,一路上看到示威的人潮,真是很強烈的對比。當時每天跟我並肩採訪作戰的日本「讀賣新聞」首爾特派員山岡邦彥(Yamaoka Kunihiko),跟我年紀相仿,我們都跟街頭的年輕人一樣興奮,一邊採訪一邊躲避催淚瓦斯。做為外信記者,一生有幾次能夠看到這樣的大規模示威的場面呢?採訪六月抗爭,是我們的記者生涯中,最值得懷念的經驗。
  
1987年的「610」(後來被稱為「韓國民主化元年」)之後,又一次周末的街頭示威,我從首爾市廳走到Press Center的路上,突然一顆鎮暴警察發射的催淚彈打到我的左手臂,但是沒有爆炸,掉到地上仍然沒有爆炸,於是我把它撿起來帶回家。很開心採訪了那麼多次街頭抗爭,終於第一次撿到催淚彈,我把它當「戰利品」供奉在家裡的電視機上。
  
到後來盧泰愚發表「六二九宣言」,讓所有的抗爭在一夕之間平息了。七月九日採訪完李韓烈的告別式之後,我回到延世大學校門口,拍了這張這一生最喜歡的戴防毒面具的照片,台灣沒有媒體人像我一樣,有這樣第一線的實戰經驗(我後來寫了一篇「如何避免採訪危險」文章,現在成為各大學新聞科系的教材)。
  
當年七月下旬,也就是六月抗爭結束一個月之後,我總算才有時間到我家附近的蠶院洞去洗車。洗車工人打開我的後車廂,卻一直打噴嚏,他不高興地問我,「你剛去了催淚彈發射的地方嗎?」我說,「這一個月來已經沒有任何地方發射催淚瓦斯了啊!」這次洗車的經驗,讓我體會了韓國生產的催淚彈的品質,真的是全世界最高,一個月之後催淚的效果仍然強大,任何可以催淚的原料像辣椒、胡椒、大蒜,以及其他刺激性的化學原料,都被用來製造催淚彈,我經常在演講中告訴聽眾,”Tear Gas, Made in Korea, really the best in the world.” 然後全場哄堂大笑。

洗完車回家,我招待了一些韓國與日本記者到我家喝茶聊天。韓國記者看到我家電視機上放著一顆催淚彈,大驚失色地說,「朱兄,電視機會發熱,這顆催淚彈如果因而爆炸的話,你的房子保證三個月不能住。」我也才感覺到嚴重性,於是第二天把這顆催淚彈帶到市廳附近,還給了一名警察。他收得莫名其妙,我也覺得做了一件非常Stupid的事情。

三十年前的記憶,因為這次朴槿惠事件,再度讓我連結起來。如果要把三十年的差異做個比較的話,大致可以發現以下幾點:
  
一、示威抗爭的手段變得更進步、更文明了。經過三十年民主文化的薰陶,群眾不再像過去那樣激情與衝動,過去都是用石頭、木棒與火焰瓶(汽油彈)來攻擊鎮暴警察,現在則改用「燭火」來象徵和平,但是用口號標語來表達憤怒的心情。這樣的理性表達,就是民主與文明進步的象徵。
  
二、公權力對付群眾示威的方式,也跟著文明而進步了。今天韓國已經不再見到「一石交換一彈」的以暴制暴場面,催淚瓦斯不再使用於示威現場;做為防止群眾衝過封鎖線的阻擋工具,則改用警用巴士一輛緊接一輛的排列,這比台灣的馬英九政權最後一年面對群眾抗爭,用帶有鐵絲利刺的「拒馬」層層包圍,把自己關在總統府裡,形成強烈對比。這是攻防雙方的進步,是非常可喜的現象。
  
儘管抗爭攻防的硬體變得和平理性了,但是在軟體的「政治文化」方面,我認為三十年來卻沒有進步,而且還倒退了。
  
韓國的民主化從1988年開始,經過盧泰愚政權的五年過渡期之後,總算終結了近三十年的「軍人獨裁政治」;但是隨後而來的「兩金」與盧武鉉政權,卻是「文人地域政治」的時代;然後又回到李明博與朴槿惠的「文人獨裁政治」時代。「獨裁」→「地域」→「獨裁」的循環,到朴槿惠總統達到了極致。
  
朴槿惠因為在獨裁者父親朴正熙身邊見學的時間,正就是朴正熙制定「維新憲法」企圖三選連任,導致全民激烈對抗,而必須靠「緊急命令」第一號到第九號來統治的時候,1974到1979正就是「第九號緊急命令治國時代」。朴槿惠根本就是獨裁統治的「幫兇」,如此形成了她的獨裁性格。這也從這次閨密干政事件爆發之後,她獨斷獨行的行事風格,可以得到證明。

跟1987年比較的話,我認為這次的情況更為嚴重。不僅是參加示威的人數,達到有史以來最大的規模,當年連屬於既得利益階層的白領階級與中產階級都走上街頭,而且宗教界的聖職者,像神父、修女、牧師、僧侶等,也都挺身上街頭抗爭,當時就能夠感受到民眾對軍事獨裁全斗煥的痛恨;這一次則是不分老少、不分男女、不分階層、不分領域,都帶著燭火上街示威,這種「全民的憤怒」,出身宮廷的朴槿惠公主根本從來都沒有體驗過。
  
如今已經是二十一世紀的民主化時代了,但是很明顯的,韓國還是被封建王朝時代的獨裁女王所統治。韓國人民好不容易在三十年前經過血淚的抗爭,才爭取到的民主政治,卻被舊思維的反民主領袖開了倒車,走回她父親的獨裁權威的老路。是誰導致朴槿惠這樣的倒行逆施發生,值得韓國人深思與反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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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억의 회복--1987에서 본 2016

주립희(대만「지한문화협회(知韓文化協會)」CEO, 1985 ~ 88「연합보 신문사(聯合報新聞社)」 서울특파원


11월 서울에서 100만명이 넘는 두번의 대규모 촛불 집회를 본 후 저는 실제로 벅찬 가슴이 끓어오르는것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진심으로 다시 한번 광화문 집회 현장으로 되돌아가서 시민들과 함께 숨시고, 외치고, 노래 부르고, 부딪치고 싶었습니다. 언론인으로서의 뜨거운 피가 다시 충만하게 몸으로 흐르는것을 느꼈습니다.

다만 현재의 일도 많고 시간 또한 허락하지 않아서 저는 타이페이의 교실, 텔레비전 또는 강연 무대위에서 학생과 시청자에게 한국의 정국을 분석하고 그들이 언론매체에서 알게된 최신의 상황을 그들을 대신해서 역사 배경과 하나 하나 엮어서 그들이 흥미를 느끼게 하고 심지어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습니다.

박근혜의 「규밀간정(閨密干政)」(여성의 규방에서 친한 친구가 정치에 개입하는것을 뜻하며, 「비선실세秘線實勢」의 대만 용어) 사건 덕분에 한달동안 저는 대만 언론 매체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었고 인터뷰와 텔레비전 담화 관련 프로그램의 출연 및 대학 동아리의 강연 요청 매우 많은 상황이고 심지어 싱가폴의 국영 텔레비전 채널도 저를 찾아오고 있습니다.

4년전 박근혜 당선 그날과 비교해보면 대부분의 대만 매체는 한국인들이 여성 대통령의 탄생을 환영한다고 했으나, 저는 「이는 독재자의 복귀이며 한국의 비극의 시작」 예언을 했습니다. 저의 이런 예언은 대만의 「공공텔레비전(公共電視, Public TV Service) 이외 어떠한 주류 채널도 상대해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아무런 도움 없는 상황의 고독감은 저를 매우 슬프게 하였습니다.

4년이 지난 후에 「박근혜 게이트(朴槿惠門 )」가 발생 하자 학생과 시청자들은 「 정말 주선생님은 선지자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선지자는 늘 고독하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하
  
1980년대 중반 한국 민주화 운동의 증인으로 1987년「6월항쟁」이 최고조에 달한 「610 범국민운동본부」성립의 그날 오후 6시 저는 현 서울 시의회 앞의 길에 있었습니다. 당시에 차량들이 모두 클랙슨을 강하게 울리는것을 보았고, 동시에 큰 소리로 군사 독재의 불만을 표하는 소리와 항쟁을 지지하는 전국민적 지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국민들의 분노에 찬 목소리는 지금까지 아직 저의 귓가에 맴돌고 있으며 저도 당시의 한국 사람들 같이 뜨거운 눈물이 눈에 글썽거렸습니다.
  
그날 이른 오후에 저는 먼저 장충체육관에서 거행되는 집권당 노태우 후보자의 지명 대회에 취재했고, 지명 대회가 끝난 이후에 체육관을 나와 시내로 돌아가는 길에서 시위 인파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두개의 장면은 매우 강력하게 대비되는 모습이었습니다. 당시에 매일 저와 함께 어깨를 부딪치며 취재를 진행한 당시의 일본 「요미우리 신문」 서울 특파원 야마오카 쿠니히코(山岡邦彥)와 저는 나이가 비슷해서 모두 거리의 젋은이들 같이 흥분하였습니다. 당시에 저희는 한편으로 취재를 진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최루탄 가스를 피해다녔습니다. 외신기자가 되어서 일생동안 이런 대규모의 시회를 몇번 볼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6월 항쟁의 취재는 저희들의 기자 생활중에
가장 가치있고 기억에 남는 경험이었습니다.

1987년의 「610」(이후에 「한국 민주화 원년」으로 불림) 이후 다시 주말 가두 시위가 있었고 저는 서울 시청에서 Press Center까지 걸어가는 길에 경찰이 발포한 최루탄을 오른쪽 팔에 맞았으나 최루탄이 폭팔하지 않았고, 땅에 떨어진 후에도 폭팔하지 않아 최루탄을 주워서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당시에 여러 차례 가두 시위를 취재 할 수 있어서, 마침내 매우 기뻤고 최루탄을 처음으로 주울 수 있었고 저는 그것을 「전리품」으로 집안 텔레비전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이후에 노태우의 「629선언」의 발표이후 모든 항쟁은 하루밤 사이에 잠잠해 졌습니다. 7월9일 이한열의 고별식 취재 이후에 저는 연세대학교 교문으로 돌아가서 일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방독면을 쓴 사진을 찍었습니다. 대만에는 저와 같이 이러한 일선에서 실전을 경험한 언론인이 없습니다. (저는 이후에 한편의 「어떻게 취재의 위험을 피하는가」 글을 작성했고 현재 각 대학 신방과에서 교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당년 7월 하순, 6월 항쟁이 종료된 1개월 후에 저는 겨우 시간을 내서 집 근처 잠원동의 세차장에 갔습니다. 세차장의 직원이 차량의 트렁크를 열면서 계속 재채기 하며 기분 나쁜듯 저에게 물었습니다. 「방금 최루탄 발포된 곳에서 왔어요? 」 저는 「1개월 전부터 최루탄을 발포한곳이 없는데! 」라고 말했습니다. 세차를 하면서 한국에서 생산한 최루탄이 전 세계에서 품질이 가장 좋다고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1개월 지난 후에 최루탄의 효과가 아직 매우 강력했고, 고추, 후추, 마늘 및 기타 자극성의 화학 원료는 최루탄의 원료가 될 수 있고, 이 모든것을 사용해서 최루탄을 제작하기 때문에 제가 강연을 할 때 청중들에게 “Tear Gas, Made in Korea, really the best in the world(최루탄은 한국에서 만든것이 세계에서 가장 좋다)”라고 말을 하면 전체 강연장은 웃음바다가 됩니다.

세차를 끝낸후에 집으로 가서 한국과 일본 기자들을 저희 집으로 초대해서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집에 방문한 한국 기자는 텔레비전 위에 올려놓은 최루탄을 발견하고 대경실색하여 말했습니다. 「주형, 텔레비전이 뜨거워져서 저 최루탄이 폭팔하게 되면 3개월 동안 집을 사용 할 수 없어요.」 이를 듣고 저도 심각성을 느끼고 이튿날 최루탄을 시청 근처에 가지고 가서 경찰에게 돌려 주었습니다. 그들은 최루탄을 받으면서도 의아하게 생각했으며, 저 또한 최루탄을 가져온것이 매우 바보(Stupid) 같은 일 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30년 전의 기억이 이번 박근혜 사건으로 인해서 다시 연결되게 하였습니다. 만약 30년 전과 차이점을 비교해보자면 대체로 아래 몇가지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1. 시위 항쟁의 수단이 진보, 문명화 되었습니다. 30년의 민주주의 문화 경험의 영향으로 군중들이 더이상 과거와 같은 격렬함과 충동이 없어졌습니다. 이전에 돌, 나무 방망이와 화염병을 통해 경찰을 공격했던 일들이 현재는 「촛불」로 바뀌면서 평화를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에도 사용하는 구호 표어는 분노하는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런 이성적인 표현은 민주와 문명 진보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공권력이 민중 시위를 대하는 방식이 문명적으로 같이 진보 되었습니다. 오늘의 한국은 「하나의 돌과 하나의 탄을 교환하는」 폭력적인 장면은 더이상 볼 수 없습니다. 최루탄도 시위 현장에 사용하지 않고 민중과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봉쇄선을 만들어서 저지하는 수단으로 경찰 버스를 일렬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대만의 마잉주(馬英九)정권의 마지막 1년의 군중 항쟁의 대항방식과 비교하면 철사를 사용해서 바리케이트를 층층으로 포위해서 총통부안에 스스로를 가두는것과 강렬한 대비가 됩니다.
이런 시위 참여자와 경찰 양측의 진보는 매우 좋은 현상 입니다.

비록 항쟁의 시위와 저지의 하드웨어적인 부분은 평화 이성적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소프트웨어인 「정치문화(政治文化)」 방면은 제가 느끼기에 30년동안 진보된것이 없고 도리어 뒤로 물러난것 같습니다.
  
한국의 민주화는 1988년 시작되어 노태우 정권 5년의 과도기를 지난 후 근 30년동안의 「군사독재정권(軍人獨裁政治)」을 끝내고 뒤이어서 「양김(兩金)」과 노무현 정권의 「문인 지역 정치(文人地域政治)」의 시대 이후 다시 이명박과 박근혜의 「문인 독재 정치(文人獨裁政治)」시대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러한 「독재(獨裁)」→「지역(地域)」→「독재(獨裁)」로 변경되는 전체 순환 모습이 박근혜 대통령에 도달하면서 극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박근혜는 독재자 아버지 박정희의 옆에서 보고 배웠기 때문에 박정희가 제정한 「유신헌법(維新憲法)」에서 만든 삼선 연임이 전체 국민들의 강렬한 반대로 이끌었고, 「긴급초치(緊急措置) 」 제1호부터 제 9호에 기대어 통치한 1974년부터 1979년까지는 「제 9호 긴급 조치 치국 시대(第九號緊急措置治國時代)」였습니다.

박근혜는 근본적으로 독재 통치의 「공범자(幫兇)」로 이와 같이 그녀의 독재적인 성격이 형성 되었습니다. 이는 규밀간정(閨密干政) 사건이 발생한 후부터 그녀가 독단적으로 결정하여 일을 처리하는 성격이라는것을 증명 할 수 있었습니다.

1987년과 비교해보면 저는 이번 상황이 더 엄중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시위에 참여하는 인원수가 역사상 최대의 규모에 달하는것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기득권 계층이 었던 화이트칼라와 중산층에 속해있는 사람 모두가 가두 시위에 나왔으며, 종교계의 성직자도 함께하여 신부, 수녀, 목사와 승려 등도 모두 가두 항전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민중들이 군사 독재 전두환을 원망하는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번은 노인과 어린이, 남자와 여자, 계급, 영역을 나누지 않고 모두가 촛불을 들고 가두 시위로 나왔고 이는 「전 국민의 분노(全民的憤怒)」로 궁정 출신의 박근혜 공주가 근본적으로 체험된 적이 없는 일입니다.
  
오늘날 이미 21세기의 민주화 시대이나 이번 사건으로 매우 분명하게 한국은 아직 봉건 왕조 시대의 독재 여왕의 통치에 속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 국민은 30년전에 피눈물의 항쟁을 겪으면서 가까스로 쟁취했던 민주 정치를 과거의 사유에 속한 반 민주 지도자에게 통치하게 했으며, 그녀의 부친의 독재 권위의 낡은 수단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누가 박근혜가 이렇게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일을 하게 했는지에 대해서 한국인들은 이에 상응하는 생각과 반성을 해야 합니다.

(韓文版原載"Media Story" 2016.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