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이 아니면, 한류도 없다!
 
 
대만이 아니면, 한류도 없다!

대만 “지한 문화 협회” CEO 주립희


2014년 8월, 한 한국 교수가 타이베이에서 강연을 진행했을 때 아래와 같은 실화를 청중들에게 공유했다. 같은해 3월, 북경에서 열린 양회(兩會: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약칭)기간에 정치국 상무위원 왕치산(王岐山)이 정부보고 중에 한류를 언급하면서 질문을 던졌다. 왜 한국 드라마가 중국을 휩쓸 수 있었을까? 무려 13억의 인구를 가진 중국은 왜 「별에서 온 그대」와 같은 드라마를 만들 수가 없는 것인가? 그는 정치 경제적인 문제들을 뒤로하고 「별에서 온 그대」의 성공 원인에 대한 검토를 촉구했다. 이 이야기는 한국대사관과 한국인 사이에 삽시간에 퍼지게 됐다.

「별에서 온 그대」는 중국의 고위 간부의 관심을 끌었고 이에 대해 한국인 모두가 신기해 했다. 사실, 왕치산(王岐山) 이전에 후진타오(胡錦濤), 원자바오(溫家寶) 등은 모두 한국 드라마의 팬이었다. 그들은 한국 방문시 한국 드라마 스타 이영애와 장나라 등과의 만남을 특별히 요청하기도 했다. 이 외에 장쩌민(江澤民)시대의 쩡칭훙(曾慶紅)과 우방궈(吳邦國) 모두 한국 드라마 시청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왕치산의 질의 반년 후인 2014년 10월 24일, 「대장금」의 스타 이영애는 홍콩의 《명보(明報)》와 특별 인터뷰를 진행 했다. (주석 1) 이때 그녀는 왕치산의 질문에 대해 답을 주었다. 인터뷰에서 이영애는 “민주화가 한류의 성세(盛世)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은 1998년부터 민주화가 시작돼 금기를 타파하고, 창조력을 발휘 할 수 있어서 한류가 발전 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영애가 답변한 한국의 독재정치 시대에는 영화와 텔레비전의 심의가 엄격했고, 여배우가 민 소매의 옷을 입고 공연 할 수 없게 규제하는 등 자유로운 표현이 억압되었던 시대였다. 한국은 김대중 정부에 이르러서야 영화 검열을 없앴다. 쟁의적인 것과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 대부분 영화로 제작 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이후 한국은 문화 창의가 잘 발휘 될 수 있게 되었고 현재의 번영에 이를 수 있었다.

젊은 시절 이영애도 홍콩 영화를 보며 자랐다. 홍콩의 스타 유덕화(劉德華), 장국영(張國榮), 종초홍(鍾楚紅), 주윤발(周潤發)등은 그녀의 우상이었다. 그녀는 그들의 영화를 아꼈다. 당시는 홍콩 영화의 전성기였고, 홍콩영화는 한국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점을 간략하게만 언급해서, 왜 현재 홍콩 사람이 한국 드라마를 보게 되었는지, 왜 현재 한국에서 유행하던 홍콩 영화가 몰락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답변은 매우 간단하다. 홍콩이 1997년 중국에 반환된 이후,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움츠려 들면서 점차 몰락하게 된 것이다.

틀림 없이 「민주화는 한류를 만들었다.」 이영애는 유일하게 홍콩에서 진실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힌 한국의 연예인이다. 그녀의 지혜와 도덕적 용기가 왕치산 등의 중난하이(中南海)의 한국 드라마 팬 고위 간부들의 부끄러움을 야기 했다고 믿는다. 그들은 자유롭게 창작하고, 말 할 수 없는 상황 아래서 우수한 영화와 텔레비전 문화를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어쩌면, 그들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가 없는 사회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한국의 민주화는 1998년 김대중 정권에서 시작되었다. 대만의 민주화보다 빠르다. 그러나 한류 문화의 기원은 대만에서 시작 되었다. 1994년 대만에서 유선 텔레비전의 자유화가 시작되면서 (속칭 「제 4 방송국 당장 합법화」) 한류가 발전 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당시 제 4 방송국은 텔레비전 채널을 말한다. 당시의 태시(台視), 중시(中視), 화시(華視) 등의 오래된 3개의 지상파 채널 이외에 유선의 텔레비전 방송국 대다수는 지방 정치인이 경영하는 위법한 방송이어서 당국의 관리를 받지 않고 있었다. 방송 업무를 주관하는 신문국(新聞局)은 이런 불법 방송을 합법화하고, 전면 개방 하고자 했다. 그러나 신문국의 계획은 철저한 사전준비가 결여되어 있었다. 24시간 방송하는 뉴스 채널은 계속 만들어 졌다. 채널이 증가하는 반면, 대만의 영화, 방송 문화에 대한 정책적인 보호장치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후 한류가 대만에 강력하게 유입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과거에 오래된 3개의 지상파 방송국 시대는 대만에서 만든 방송 외에 대다수가 일본 드라마였다. 이 때문에 일본 드라마는 계속해서 비싸졌다. 그러나 텔레비전 자유화 이후, 유선 방송국들은 24시간 방송을 위해서 많은 영상이 필요 하게 됐고, 새로운 방송 영상들을 모으기 시작 했다. 당시 저렴한 가격의 한국 드라마가 이런 형태에서 다량 유입되기 시작 했다. 대만은 한국 드라마가 가장 먼저 수출된 곳이었다. 한국 드라마 업체와 대만 텔레비전 방송국이 계약하게 되면서 한국 드라마는 동남아의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까지 진출 하게 되어 대만 방송 프로그램과 같이 판매되었다.(당시 싱가포르 텔레비전 방송국은 모두 대만 드라마와 대만에서 선택된 영상을 방영 했음). 이후 한국 드라마는 홍콩과 중국까지 판매되기 시작 했다.

한국의 전 주 대만 대사 구양근(具良根)은 대만이 한류의 발원지라고 공개적으로 인정 했다.(2011.8.4). 그에 말에 따르면 2010년 대만에 162편의 한국 영화 및 드라마가 방송 되었다(단, 당해 한국에는 대만 드라마가 한편도 방영되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라, 「한류(韓流)」라는 단어는 대만에서 먼저 만들어 졌고, 「한자 문화권」인 동아시아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2006년 8월 31일, 「워싱턴 포스트」지가 일본 여성의 한류 열풍에 대한 보도 중 「한류(韓流, Korean Wave)」라는 단어를 사용 했다. 기사는 1990년대 중반 베이징의 한 신문기자가 한류라는 단어를 처음 만들었다고 잘못 보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는 잘못된 서술임에도 불구하고 학계와 매체를 통해 계속 인용 되었다.

사실, 1990년대 중반 중국은 한국 드라마를 도입하지 않았었다. 「한류」라는 단어는 대만 신문의 영화 드라마면에서 시작되었다. 1995년 한국 드라마가 대만에 들어온 후 대만의 언론 매체는 「한류 침입」으로 야유하고 폄하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만 언론 매체는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를 중시하지 않았다. 그 중에 대만의 북부 사람은 습하고 차가운 「한류(寒流)」(한국말: 한파)를 싫어했는데, 같은 발음 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대만이 한류의 발원지와 기폭제 이면서 「한류」의 창조자이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한류의 발전 모습을 구분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제 1대 한류」는 1995 ~ 2005년의 10년간을 가리킨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 등의 영상 내용의 상품이 주를 이루었고, 소량의 음악 작품이 발전하기 시작 했다. 한류가 퍼져나간 지역은 대만에서부터 일본, 동남아, 중국에 달했다.

「제 2대 한류」는 2006 ~ 2011년의 기간을 가리킨다. 이 시기 한류는K-Pop의 공연 그룹과 개별 아이돌 스타 위주로 변화 되었다. K-Pop의 인기는 드라마와 영화를 넘어 섰다. 퍼져나간 지역은 여전히 대만에서부터 홍콩, 동남아, 미주와 유럽의 일부에 달했다.
2012년에서 지금까지는 「제 3대 한류」라고 할 수 있다. 기타의 한국 문화: 한식, 여행, 복식, 화장품, 성형 등이 세계 각지로 전면 확산되기 시작 했다.

제 2대 한류의 핵심인 K-Pop경우, 거의 모든 공연 그룹이 대만을 해외 공연의 시금석으로 찾고 있다. 연예 기획사는 대만 시장에서 흥행하면 전체 중국인의 시장에서도 가능성이 많다고 여기고 있으며, 대만은 한국 공연 그룹이 중국 시장으로 진출하는 발판이 되고 있다. 이런 추세는 많은 그룹이 1차적으로 대만에 와서 표를 팔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간 후 인기 거품이 사라져 해체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류의 성장에는 대만에서의 한류의 발전과 함께 한국 국내에서의 원인 또한 매우 중요하다. 1997년 금융위기로 한국은 국제통화기금차관에서 584억 달러를 빌렸고 경제는 IMF의 관리에 들어갔다. 당시 재벌 기업은 전 국민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부실한 재무구조의 개선이 계속 요구 되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SOHO(Small Office, Home Office)족 극작가, 프로그래머 등의 문화 예능 콘텐츠 창조 인재가 두각을 나타냈다. 이들은 재벌의 제약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새로운 세력을 형성했다.

당연히 김대중 취임 후 전면적인 민주화의 원인도 한류의 성장에 큰 공을 세웠다. 이중에는

1.반란과 내란을 통해 집권한 2명의 전 대통령에 중형을 내려 과거사 정리 체제가 만들어 졌고 민주화 시대가 시작되었다.

2.사상, 언론, 창작, 표현 등의 자유를 전면 보장했다.

3.「문화 입국(文化立國)」정책을 제정해서 입법을 통해 문화 산업의 발전을 추진 했다.

4.백제 문화와 신라 문화의 융합으로 한국의 대중문화를 탈바꿈하여 참신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지역 갈등은 여전히 깊다. 한국인들은 이런 요인을 알지만 잘 말하지 않았다.)

5.일본 문화 상품의 수입을 전면 허용해서 영화와 텔레비전 산업이 일본의 다양한 문화적 양분을 얻을 수 있게 했다.

6.각 대학에 「문예창작과」를 설립 했다. (2012년까지 33개의 대학) 대량으로 극본 창작 인재가 배양 되었다. (2012년 모두 2,531명의 극작가가 배양되었고, 이중 87%는 여성이다.)

아울러 우리는 한국이 전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매우 빠르게 발전한 국가이며, 거의 매 20년 마다 한 가지의 기적을 만들어 내는 국가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1.「경제 기적」: 1960년대 초 경제 개방 5개년 계획 발전을 시작해서 1980년대 초에 「한강의 기적」으로 아시아의 4마리 용에 오르게 되었다.

2.「정치 기적」: 1970년대 말 여전히 독재 정권이었으나 1990년 말에 들어서면서 민주화를 실현하였다.

3.「외교 기적」: 1973년 선포된 「북방 외교」로 북쪽의 2개 공산 국가와 관계 개선을 시작해서 1992년 완전히 실현 시켰다.

2000년대 초기 시작된 한류의 발전으로 한국은「문화의 기적」이 창조되어 증명될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 문화의 기적은 장단점을 반반씩 가지고 있다. 한국의 경제가 거의 「중국에 예속」되어 있어서 중국의 경제가 쇠퇴하면 한중 FTA 성과가 파괴된다. 경제 불경기는 문화 산업 발전에 분명히 영향을 준다. 그리고 한 나라의 인재와 인구는 정비례한다. 한국은 인재의 한계로 문화 창의가 고갈 되기 시작되고 있다. 이는 한류가 앞으로 10년 더 지속될 수 있는지 의문을 주는 핵심적 단점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성향 중 하나는 효과가 바로 나타나지는 않은 교육에 투자함으로써 현재보다 더 높은 곳으로 변화하는 모습이다. 이는 「BK21」(브레인 코리아 21: 21세기 한국 인재 배양, 주석 2)의 교육 투자 기획으로 각 영역의 우수한 인재의 지속적 배양을 기대 할 수 있어서 한국 미래의 경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대만과 한국 정치 발전의 궤적은 매우 비슷했다. 1990년대 중기 이전 대만의 힘은 한국보다 강했고, 문화 발전 또한 한국보다 다양하고 앞서 있었다. (예를 들어 대만의 새 영화 흐름은 국제 영화제에서 충분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러나 민주화와 한국의 경제위기 이후 두 국가의 차이는 점점 커졌다. 한국은 20세기말 대중 문화 발전 수준이 대만을 넘어섰다. 2004년에는 평균 국민 소득 또한 대만을 넘어섰다. 대만 문화와 경제는 모두 한국에 졌다. 대만인은 한국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있다. 이전의 우월감이 좌절되는 감정에서 나타난 피해의식으로 이로 인해 맹목적인 반한(反韓)감정이 유발되었다.

실제 대만인의 「반한」감정은 장기간 국제적 고립으로 야기되어온 「트라 우마 신드롬」의 구체적인 발현이며, 경제와 문화적 실패 이후의 질투심으로 인한 것이다. 이는 대만인의 깊은 자기반성으로 서로 함께 노력하여 수정해갈 필요가 있다. 대만은 왜 오랜 기간 교두보의 역할을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의 가치와 위상을 만들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도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편, 한국도 계속해서 대만을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만 여기고 있다. 대만에 대한 어떠한 보답이나 호의적인 피드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은 한국의 대중문화 상품을「미남미녀」, 「꽃 미남」, 「근육 남」등과 같이 아름답게 포장하는 방식의 마케팅전략을 취했다. 이를 통해 해외시장을 공략했고, 외국인들로 하여금 한국에 대한 착각에 일으키게 됐다. (아, 한국사람 다 이렇게 잘 생겼구나!). 반면, 해외에서의 동성애 용인 경향과는 반대로 한국사회내에서는 동성애에 대해 극단적으로 배척적이다. 이러한 상황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책임감이 없는 행동이고, 도덕적이지도 않다. 이처럼 한국의 대중문화는 긍정적인 면만 강조하고 있고, 부정적인 면은 축소하거나 외면하고 있다.

단기적으로 말하자면, 대만은 한국에 패했다. 그러나 대만 사회는 한국에 비해서 「다원화」, 「자유」, 「평등」, 「배외적이지 않고」, 「개인 존중」, 「계급 의식 없고」, 「경제 민주화(재벌의 농단과 통제가 없다)」등이 면에서 월등하다. 이런 「소프트 파워」는 대만의 우수한 장점이다. 대만인은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자신을 비하 할 필요도 없다. 장기적으로 말하자면 대만의 다원적 가치는 한국보다 강하고 최종적으로 성공하는 요건이 될 것이다.

대만과 한국 민주화 전환 성공의 경험은 「유교문화권」의 아시아도 100% 서방의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 제도를 할 수 있다는 증명이며, 이는 우리가 인류문명에 바치는 공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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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 명보(明報) 이영애의 특별 인터뷰
http://news.mingpao.com/pns/%E6%9D%8E%E8%8B%B1%E6%84%9B%EF%B9%95%E6%B0%91%E4%B8%BB%E7%B7%A0%E9%9F%93%E6%B5%81%E7%9B%9B%E4%B8%96/web_tc/article/20141024/s00002/1414085975303

주석 2 : 한국은 1999년부터 2005년까지 1조 5700억 원(13.4억 달러)을 투입해서 「브레인 코리아 21」을 추진했다. 고등 교육 개혁을 계획 후 2006년부터 2013년 간 2조 3000억 원(23억 달러)을 투입해서 2차 BK21을 기획 진행 했다. 2013년부터 2019년 이름을 바꿔서 「BK21+」로 3조 3143억 원(33억 달러)으로 확대했다.

(“지한 문화 협회” CEO 주립희는 대만 국립 정치 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시사한국어”, “북한연구”, “한국 정치와 민주화”, “한국 과거청산 영화 감상”등 4 과목 강의 하고 있다. 대만의 최고 한국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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沒有台灣,就沒有韓流!

2014年8月,一位韓國教授在台北演講時,說了這個真實的故事:當年三月在北京召開的兩會期間,政治局常委王岐山在政府報告中公開提到韓劇,他並質疑,為什麼韓劇佔領了中國?堂堂十三億人口的中國,為什麼拍不出一齣「來自星星的你」這樣的連續劇?他擱下政經大事不談,要大家討論「來自星星的你」成功的原因。這故事很快傳出,也傳到韓國大使館與韓國人圈子。
  
「來自星星的你」會引起中國高幹的重視,韓國人都嘖嘖稱奇。其實,在王岐山之前,包括胡錦濤、溫家寶等人都是韓劇的粉絲,他們訪韓時,都特別要求會見韓劇紅星李英愛、張娜拉等。此外,江澤民時代的要員曾慶紅、吳邦國也都表示過愛看韓劇。

對於王岐山的質疑,半年之後的2014年10月24日,以「大長今」走紅的李英愛接受香港《明報》專訪時(註一)給了他答案:民主化締造了韓流盛世!韓國從1998年開始的民主化,打破專制禁忌,釋放的創造力讓韓流橫掃亞洲。

李英愛說,韓國在獨裁專制時代,對影視節目審查嚴苛,女演員甚至不能穿著無袖露肩的衣衫演出,人民的表達自由和創作自由備受壓抑。直到金大中政府廢除電影審查制度,爭議性與政治敏感的議題都能成為電影題材,文化創意迸發,終於有了今日的繁榮。

李英愛還提到,年輕時她都是看香港的電影,港星像劉德華、張國榮、鍾楚紅、周潤發等都是她的偶像,他們的電影她都可以如數家珍。當年香港電影的全盛時期,對剛起步的韓國影響極大。但是她只是點到為止,她沒有說到為什麼今天香港人反過來看韓劇,為什麼香港電影沒落了?答案很簡單,那就是香港回歸之後,言論自由與表達自由被限縮了。
  
沒錯,「就是民主化締造了韓流」。李英愛是唯一在香港講出真話的韓國藝人,她的智慧與道德勇氣,相信會讓王岐山等中南海的韓劇迷高幹們羞愧不已,他們難道不知道沒有創作與表達的自由的話,就不會有優質的影視文化發展嗎?也許是因為他們沒有在民主體制下生活的經驗,所以他們是真的不懂。
  
韓國的民主化雖是1998年金大中執政才真正開始,不過韓流文化的起源,卻是始自於台灣。1994年台灣開放有線電視自由化(也就是俗稱的「第四台就地合法化」),為韓流後來的發展鋪路。

當時的第四台,指的是台視、中視、華視等老三台之外的有線電視台,大多為地方政治人物經營來固樁的違法播放,在無法可管的窘境之下,主管廣電業務的新聞局索性就地合法而全面開放。但是,事前的配套規劃付之闕如,以致於二十四小時的新聞頻道不斷衍生,對本國的影視文化也沒有任何政策保護的設計,以致於韓流強烈襲台迄今。

過去老三台時代播放的外片大多為日劇,但是越買越貴,電視自由化之後,有線頻道為了二十四小時運轉的大量需求,開始蒐羅新的片源,於是便宜又大碗的韓劇便趁勢而入,台灣因而成為韓劇的第一個出口國。韓國片商跟台灣電視台簽約後,帶著合約到東南亞兜售,新加坡、馬來西亞(當年新加坡電視台幾乎都播台劇也跟著台灣選片)就跟著買,再賣到香港後就進入中國了。
  
南韓前駐台代表具良根都公開承認,台灣是韓流的發源地(2011.8.4.);他並說,2010年台灣一共播放162部韓片(但是當年韓國一部台片都沒有進口)。不僅如此,連「韓流」這個術語,都是從台灣創造的,然後才傳遍「漢字文化圈」的東亞各國。2006.8.31.「華盛頓郵報」在一篇探討日本女性瘋迷韓流的專題報導中指出,「韓流」(Korean Wave)是1990年代中期由北京的新聞記者所創的,這根本是不明就裡的錯誤論述。但是這個錯誤論述,卻一再被學術界與媒體反覆引用。

事實上,1990年代中期,中國尚未開始引進韓劇,「韓流」一詞是源自於台灣報紙的影劇版。在1995年韓劇開始進口台灣之後,台灣平面媒體開始以「韓流入侵」來揶揄與貶抑當時並非很看得起的韓國影視產品,取其與台灣北部人厭惡的濕冷「寒流」的同音字而傳播開來。所以,台灣不僅是韓流的發源地與推手,更是「韓流」一詞的創造者,殆無疑義。
  
以時間軸來區分韓流發展的樣貌,通常「第一代韓流」指的是1995∼2005的十年間,以韓劇與電影等影像內容產品為主,加上少量才剛起步的音樂作品,發展地區從台灣、日本、東南亞,再到中國。「第二代韓流」則是2006∼2011,開始轉型為K-Pop的演唱團體與個別偶像明星為主,大幅超越了韓劇與電影,發展仍始自台灣,再到香港、東南亞、美洲與部分歐洲。從2012年迄今算是「第三代韓流」,以其他的韓國文化:包括美食、旅遊、服飾、化妝品、整形美容等為主,開始全面擴散到世界各地。
  
以第二代韓流主力的K-Pop為例,幾乎所有演唱團體都以台灣做為海外公演的試金石。大型演唱經紀公司認為,只要台灣市場能夠賣座,整個華人圈的市場就大有可為。所以,台灣成了韓國演唱團體進軍大中國市場的跳板;許多第一次來台灣卻闖不出票房的演唱團體,回韓國之後就立即泡沫化而解體。
  
除了台灣扮演了韓流的推手之外,韓國本身的國內因素也很重要。1997年爆發的金融危機,使得韓國向國際貨幣基金尋求584億美元的紓困,經濟也由IMF接管。當時大財閥企業成為全民公敵,要求改善財閥的不健全財務結構的呼聲不斷。在這樣的社會氛圍下,SoHo族的文創人才像劇作家、軟體程式設計師等開始出頭,成為不受財閥制約,能靠自力起家的新貴。

當然金大中上任後,全面民主化的因素也功不可沒。其中包括:一、對叛亂與內亂的兩名前總統判處重刑,完成過去清算,也建立了轉型正義的機制;二、全面保障思想、言論、創作、表達等自由;三、制定「文化立國」政策,透過立法來推動文化內容產業的發展;四、百濟文化與新羅文化的融合,為韓國大眾文化的蛻變,提供了肥沃的土壤,而綻放了嶄新的文化花朵(因為地域仇恨仍深,韓國人知道這個因素,但他們通常避而不談);五、全面開放日本文化產品的進口,讓影視業從日本多元的文化得到養分;六、各大學紛紛開設「文藝創作系」(截至2012年共有33所大學),大量培育劇本創作人才(至2012年一共培養劇作家2531人,其中女性占87%)。
  
我們也不能否認,韓國是全世界絕無僅有、最積極上進的國家,幾乎每20年就創造一項奇蹟:一、「經濟奇蹟」:1960年代初開始發展五年經濟計畫,到1980年代初以「漢江奇蹟」躋身亞洲四小龍;二、「政治奇蹟」:1970年代末期仍是獨裁政權,到1990年代末期落實民主化;三、「外交奇蹟」:1973年宣布推動「北方政策」要與北邊兩個共產國家建立關係,到1992年完全落實。
  
從2000年代初期開始活絡發展的韓流,能否創造出「文化奇蹟」,還有待時間證明。目前看好與看壞各半,因為韓國經濟幾乎完全「鎖在中國」,中國經濟的衰退,連帶也使韓中FTA完全破功。經濟蕭條必然影響文化產業的發展;其次,畢竟人才與人口成正比,人才的極限也讓文化創意開始枯竭,這是看壞韓流再撐不了十年的主因。

不過,一個不是可以立竿見影的教育投資,正在改造與提升韓國人民的素質。這項名為「BK21」(頭腦21:培養21世紀的韓國人才,註二)的教育投資計畫,可以期待會持續培養各領域的優異人才,這是未來韓國競爭力的泉源。

二次世界大戰之後,台灣與韓國政經發展的軌跡幾乎同步,1990年代中期之前台灣的實力比韓國強,文化發展也比韓國多元與先進(例如,台灣的新電影浪潮在國際影展鋒頭十足);但是民主化與金融危機之後,兩國的差距逐漸拉大。韓國繼二十世紀末期大眾文化發展超越台灣之後,2004年起平均國民所得也超過台灣。也就是文化與經濟,台灣都輸給了韓國。台灣人的韓國情結,從優越感到挫折感,再到受害妄想症,甚至產生盲目的反韓。

其實台灣人的「反韓」是長期的國際孤立,所導致的「創傷後症候群」(Trauma Syndrome)的具體投射,加上經濟與文化落敗後的忌妒心理而產生。這需要台灣人深切的自我反省,並且攜手努力來療癒。
  
不過,韓國始終把台灣當做進軍中國的跳板,卻未對台灣有任何回饋或善意的報償,頗有可議。例如,韓國的大眾文化產品一貫是以精美細緻的包裝與強力的行銷對外輸出「俊男美女」,甚至是「花美男」與「肌肉男」,讓外國人眩惑而對韓國社會產生錯覺;但自己國內卻極端排斥同性戀文化,只在國外助長當地的同志傾向與風潮,坦白說這是極不負責任又不道德的。而台灣如何擺脫長期以來被當跳板的角色,創造自我的價值,也是值得我們省思的。

儘管就短程而言,台灣輸給了韓國。但是台灣社會比韓國「多元」、「自由」、「平等」、「不排外」、「尊重個人」、「沒有階級」、「經濟民主化(不受財閥壟斷與宰制)」等。這些「軟實力」都是台灣的優勢!台灣人不必自卑也不能妄自菲薄!長程而言,台灣的多元價值比韓國更具終極成功的要件。

台灣與南韓民主化轉型成功的經驗,證明「儒家文化圈」的亞洲,是可以100%落實西方的自由民主、資本主義制度,這也算是我們對人類文明的貢獻。

註一:明報專訪李英愛的連結:http://news.mingpao.com/pns/%E6%9D%8E%E8%8B%B1%E6%84%9B%EF%B9%95%E6%B0%91%E4%B8%BB%E7%B7%A0%E9%9F%93%E6%B5%81%E7%9B%9B%E4%B8%96/web_tc/article/20141024/s00002/1414085975303

註二:韓國在1999年至2005年投入1兆5700億韓元(13.4億美元)推動「頭腦韓國21」(Brain Korea 21,簡稱BK21)高等教育改革計畫後,2006年至2013年間再投入2兆3000億韓元(23億美元)進行BK21的第二期計畫;2013年至2019年改名為「BK21+」,擴大到3兆3143億韓元(33億美元)。

(本文發表於2016年7月號「兩岸公評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