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종중 從中 (馬英九)정부」아래 국가폭력과 인권
 
 
대만 「종중 從中 (마잉주馬英九)정부」아래 국가폭력과 인권

발표인: 주립희(朱立熙)
대만「지한원(知韓苑)」대표, 까오슝시 인권 위원
2015/5/15, Gwangju, World Human Rights City Forum


먼저, 저는 여기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높은 존경심을 나타낸다. 우리가 있는 이곳은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국제회의센터이고 우리는 이곳에서 회의를 진행 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한국인들이 얼마나 그를 존경하는지를 짐작 할 수 있을 것 같다. 김대중컨벤션 센터에 처음방문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올해 다시 이곳을 방문하니 더욱 깊고 특별한 느낌을 받는 것 같다. 더욱이 아시아 최후의 독재자인 2개월 전에 별세를 한 싱가포르 전 총리 리콴유(李光耀)와 김대중을 비교를 해보면 더욱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위대함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리관유는 3월 23일 별세하였고 12시간 이후 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4년 12월 게재한 “Foreign Affairs”의 한 글인 “Is Culture Destiny? The Myth of Asia's Anti-Democratic Values”을 찾아보았다. 당시에 저는 이 글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는데, 1998년 2월에 대만에서 번역 출판된 「대중 경제론(Mass Participatory Economy)」 의 부록에 속하는 것이었다.

저는 이 글에서 발췌한 일부분을 저의 페이스 북에 포스트 하였고 하루가 지나지 않아 삼백 명의 친구들이 공유를 했습니다. 이중에 20%의 알지 못하는 친구들 이었고 이들은 저와 페이스 북 친구를 하기를 원했다. 이 일은 저에게 놀라운 일이었다. 이 글은 리관유의 「서방 민주 제도 아시아에 적용할 수 없다.」 반박하는 글이었다. 김대중의 굉장히 적은 수의 글이 중국어로 번역 되어있는데 그 중에 한 글이다. 이는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중국어권 세계의 독자에게 식견을 넓이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들로 하여금 중국어 주류 대중매체의 리콴유를 찬양하는 의견과 정 반대되는 글을 읽게 되었다. 리콴유를 비판하는 소리는 같은 「유교문화권」의 아시아 민주화 성공에 성공한 한국 야당 정치 지도자인 김대중은 중국어권 독자로 하여금 많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중국어 문화권에서 저는 김대중의 이 오래된 글을 찾아서 발표한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매우 애석하게도 한국의 인터넷 상에 이와 관련된 한편의 보도 밖에 찾지 못했고 Polinews의 한 기자는 리관유, 박정희와 김대중을 비교하였고 이 글은 상당히 깊은 분석이 있었다. 다른 한국 주류의 대중 매체는 리관유의 사망 후 김대중이 리관유에 대해 비판한 것에 대해 보도 하지 않고, 한국의 자유 진보파의 지식인도 별다른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는 저로 하여금 실망감과 의심을 갖게 하였다. 설마 보수 정권 아래 모두들 남한을 자유민주국가로 승인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그래서 김대중의 공적 또한 모두 말소 되어버린 것인가? 이는 김대중에 있어서 매우 불공평한 일 이다.

일본 대중 매체는 비교적 분명하게 김대중과 리덩후이(李登輝)의 지혜와 위대에 드러내고 있다. 또한 「유교문화권」의 한국과 대만에서 서방의 민주와 자유선거제도가 100%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 해주며, 이는 싱가포르와 중국 또한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외에 이미 세상을 떠난 미국의 잘 알려진 학자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 일찍이 말했다. 「리덩후이가 별세 했을 때 대만 민주 체제는 남아있을 수 있으나, 리콴유가 별세 했을 때는 그의 체제는 남아있을 방법이 없다.」 리콴유가 말했던 「역사가 평가를 내린다」라는 말이 이 논점을 믿게 해준다.

사실상 오늘날에 다시 되돌아보면 우리는 모두 일찍이 「개발독재」를 거친 시대이며 역사의 평가는 사실 이미 확정되어있다. 또한 「이씨(李氏) 왕조 / 장씨(蔣氏) 왕조/ 박정희」의 독재와 「리덩후이 / 김대중」이 만든 대만과 한국의 민주 성과는 전세계로 하여금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반어적으로 말하자면 민주는 하나의 곧게 뻗은 길이 아닌 꼬불꼬불한 길이며, 대만과 한국의 경험은 각 20년과 10년의 민주 시간 이후에 모두 보수 정권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어 민주로 가는 길 또한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한국은 2012년 국정원의 정치 중립을 위반하고 대통령 선거에 개입한 일, 2014년 「세월호 침선 참사」의 인재 및 정당의 강제해산 등을 통해 보수정권 아래 민주는 후퇴의 길로 들어선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반 민주적인 사건은 한국 친구들 모두 저보다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믿으며 저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다. 저는 여기서 모두에게 대만의 지난 7년간 사이 한국과 같이 보수정권으로 돌아간 마잉주 정부가 어떻게 도행역시를 하는지, 그리고 그의 지지율이 9%로 떨어졌을 때 계속해서 민의를 거스르고 국가의 강제적인 힘으로 인권과 대만사람을 침해하여 적대적이 되었는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1. 야생 딸기 학생 운동

2008년 5월에 마잉주(馬英九) 정권 출범하였고 부임한 직후에 「친 중국 노선」을 시작하였다. 반년 후인 11월 3일 중국은 대만 업무를 처리하는 가장 높은 관원인 천운린(陳雲林)이 대만에 방문하였을 때 북경에서 파견하는 특사를 영접과 보호를 위해 많은 수의 보호조치를 취하여 항의하는 대만민중이 그에 근처에 닿지 못하게 하였다. 천운린의 대만 방문은 2번째로 고위급 회담을 하는 것이었고 “치안유지” 불리는 경찰은 대만사람을 거칠게 몰아내고, 시위도구를 몰수하고, 금지령, 체포 등을 통해 회담에 동의하지 않는 민중에 대처했다. 그 중에 가장 황당한 일은 민중이 길가에 중화민국(中華民國, 대만) 국기를 들고 시위를 하면 경찰이 이를 재빠르게 몰수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의 국가 안에서, 자신의 국가의 국기를 들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여러 수단을 동원해서 인민의 기본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였다.

마정부는 각종 기본 인권을 침해하였고 전 대만의 대학생들, 교수와 사회인사들이 연좌시위 운동을 유발하였다. 학생은 인터넷 매체를 통해 호소하였고, 수 천명의 민중은 자발적으로 사건 발생후의 11월 6일부터 다음 해 1월까지 행정원 앞, 자유 광장(장개석기념당), 전 대만 각지의 대학교 교정에서 연좌시위 농성의 방법으로 「공권력 폭행, 인권 침해, 집회 시위 법 개정」을 요구하였고 「마잉주 총통은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경찰청장 왕주어쥔(王卓鈞)을 실각시켰다.」요구하였다. 이는 1990년 이후 18년 내에 가장 큰 규모의 학생 항쟁 운동이었고 이를 「1106 인권 쟁취, 반 집회시위 법 연좌시위」라고 부른다.

학생과 민중의 항쟁 과정 중 비록 사망자는 없었지만 경찰의 폭력 남용과 많은 유혈사건에 대해 민주화 이후에 출생한 대학생 세대들에게 큰 충격과 두려움을 주었다. 그들은 자유와 민주 그리고 기본인권이 국가의 폭력으로 하여금 짓밟히는 것을 본적이 없었고, 처음으로 이런 상황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이중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을 말하자면 대만의 「집회시위 법」은 허가제를 규정하고, 통제 구역, 해산 명령, 행정 처벌 등 모두 시대가 지난 민주 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법이었다. 다시 말하면, 마정부는 여러 번
이 낡은 악법으로 민주 시대와 민중의 자유 표현을 억압하였다.

이번 항쟁운동은 마정부가 부임한지 1년이 되지 못하는 시간에 발생했고 이 사건으로 민중과 적대적이 되어 민중의 신임을 잃고 지지율 또한 대폭으로 하락하게 되었다. 마정부는 인기가 떨어지는 때에 양안(대만과 중국)경제관계의 강화를 강행하여 열세에 처한 지지 상황을 시정하고 돌리려고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대만 정부는 2009년 《양안 경제합작 구축 협의(Cross-Straits Economic Cooperation Framework Agreement)》을 정식 서명하여 중국에 제출 하였다. 이후 2010년 6월 29일 충칭(重慶)에서 제 1차 협상이 조인되어 상품의 무역, 서비스 무역, 투자 보장 및 분쟁해결협의에 대한 협상을 전개하였다.

이는 FTA의 협정과 비슷하나 한국이 미국, 중국과 FTA를 체결하기 전에 10년 이상 토론, 협상, 수정하여 다시 국회, 민의를 통하여 다수의 공통된 인식을 형성한 이후 정식으로 서명 하는 것과는 달랐다. 양안의 ECFA는 마잉주의 2008년 초에 총통경선의 공약 중에 나온 것이며 당선된 후 조인하였으므로 2년 반에 불과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와 같은 급진적이고 지나치게 중국에 치우친 방법으로 처리한 일에 대해서 일반 국민은 아무런 경제적 이익을 느낄 수 없었다. 이는 일반 민중이 더욱 마잉주에 반감을 가지게 되는 일이었다. 마잉주의 배후에는 그를 지지하는 소수의 중국 투자자와 경상 기업가들이 존재하였고 「양안 정경유착 집단(兩岸政商集團)」을 통해서 이득을 얻은 사람은 이들뿐 이었다.

2. 대중 매체 독점 반대 운동

마잉주 정부는 친중 노선(親中路線)으로 민중들 사이에 의구심이 퍼지고 있는 2012년에 중국에 쌀과자를 파는 왕왕 그룹(旺旺集團)이 대만 돈 220억 원으로 경영이 좋지 않았던 「중국시보 매체 그룹(中時媒體集團)」을 사들였다. 이 대만 상인은 많은 현금으로 하나의 대중 매체 그룹을 사들였고, 전 국민은 베이징의 국무원이 배후에서 자금을 지원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의심하였다.

새로운 주인이 들어온 이후 왕중 그룹의 회장 차이옌밍(蔡衍明)은 《워싱턴 포스트 지》의 인터뷰를 받아서 보도 하였는데, 1989년 6.4 천안문 대학살 사건 「사망자는 없었다」는 보도 이었다. 이 보도는 중국의 정부당국의 인민일보 보다 더한 인민일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보도를 본 중국의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분노하였고, 대만의 지식인 또한 매우 놀랐으며 성명서를 발표하여 중국시보 불매운동을 하였다. 이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왕왕 그룹 등 대만의 재벌 그룹을 통하여 대만의 민주에 관여할 수 있다고 생각 하게 되었다.

이어서 7월 31일 대만대학교, 칭화대학교 등 30여 개 학생 동아리는 인터넷 상에 반 언론 괴수 청년 연맹을 결성하였다. 700명의 학생이 합류하여 중천 텔레비전 방송국(中天電視台) 앞에서 중시 그룹의 보도 불공정과 왕중 그룹에 불만을 나타내는 항의를 했다. 시위의 구호는 「저는 학생입니다. 우리는 왕중(旺中)에 반대합니다」이었으며 정식으로 대중매체 독점을 반대하는 선언을 기입하였다.

대중매체 독점 반대 운동은 반 언론 괴수 운동이라고 불리며 2012년 대만에서 개시한 학생 사회운동이다. 901 대중매체 독점 반대 연맹과 각 대학의 학교 학생이 조직한 반 언론 괴수 청년 연맹 등을 주요 단체로 하는 운동을 추진 하였다. 왕중의 유선 텔레비전 유통 시스템의 인수 합병 반대, 이(壹)대중매체 인수 합병 반대 등의 대중 매체 독점 반대 법 제정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대만신문의 자유, 대중매체 독점 반대, 중국의 자금과 대만의 재벌 그룹이 대만의 대중매체를 통제를 방지 등을 위해 법 제정을 요청 하였다.

9월 1일 또한 대만의 「기자의 날」에 백여 개의 민간 사회단체는 「대만 신문기자 협회」의 주도 아래 대중매체 독점 반대 시위를 진행하였다. 이 민간 단체는 901 대중매체 독점 반대 연맹을 조직하였고 공동으로 대중매체 독점 반대운동을 추진하였다. 반 언론 괴수 청년 연맹 또한 그 중에 하나로 참여하였고 학생 운동과 사회운동이 동맹하는 형식으로 형성되었고 이는 수년이 걸려 어렵게 나타난 일이었다. 이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 수는 총 2만 명이었으며, 대만의 역사상 특정한 신문 대중매체를 겨냥하여 발생한 가장 큰 첫 번째 시위 활동이었다. 또한 대중 매체를 이슈로 한 항쟁운동의 첫 번째 시위로 시작하게 되었다. 시위는 충돌 없이, 유혈 사태 없이 평화적이고 이성적으로 끝마쳤다. 그러나 중국 자본의 대중 매체는 잠식은 대만인을 각성하게 하였다. 중국의 인민일보는 대만으로 수입될 필요가 없었었다. 왜냐하면 이미 대만 안에 대리인 있어서 중국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만약 마잉주 정권의 친중 노선이 아니었다면 중국이 대만에 침입 하거나 모든 신문 매체에 침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한번 생각해봐도 좋은데, 북한의 자금이 남한에 들어와 주류 신문을 사들여서 「조선일보」가 「노동신문」와 같은 내용을 남한에 보도한다면 한국 사람들은 이를 받아 들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스페인 내전기간의 「제5 부대(The Fifth Column, 스파이 부대)」에서 볼 수 있으며, 대만에 중국의 목소리를 내는 대중매체가 이미 대만의 사회의 각 영역에 침투되었다. 친 중국의 마잉주 정부는 대만인의 피아를 구분하지 않았고 대만의 군대 또한 「무엇, 누구 위해 싸우는지 모르는」가치 혼란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3. 군대 인권 유린 사건

이는 대만에서 발생한 육군 사병 사망 사건이다. 의무 병역 사병 홍중치우(洪仲丘)는 원래 2013년 7월 6일 제대가 예정되었으나 7월 4일에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애매모호한데 괴롭힘, 학대를 당하거나 혹은 다른 군인의 추행 등이 사회적 관심을 일으켰다. 국방부는 7월 15일 행정 조사 보고를 공포하였다. (「육군 6군단 호구 장갑 542여단 홍중치우 하사 감금실에 사망한 사건」) 육군 제6군단의 장갑 542여단과 기계 보병 269여단 모두 감금 실에 수감을 하는 과정 중에 문제가 있었다고 했다.

홍중치우는 6월말 제대하기 전에 촬영 기능이 있는 핸드폰과 MP3를 가지고 병영에 들어왔고 이는 군 정보 안전 보안 규정을 위반한 일이었다. 홍중치우는 사병상벌평의위원회(사평회)에서 처벌하여 269여단 고산주둔지로 이송되어 감금 실에서 「잘못을 뉘우치는 일」을 시작했다. 당시 체중은 98킬로로 신체의 체중 지수는 매우 높았다. 감금 부대는 여전히 훈련을 집행했고 홍중치우는 더위를 먹고 기력이 쇠약해져 혈관 내 피가 확장되어 피가 응고되어 사망했다.

이 사건은 군대 내의 인권 관련 및 군사 검찰의 관할권의 유무 등의 이슈에 대해 대만 사회의 높은 관심을 이끌어 냈다. 「1985 시민 행동 연맹(公民1985行動聯盟)」의 「국민 교육 징집 운동(公民教召運動)」, 「8월 눈(雪) 운동 (八月雪運動)」등 2개의 항의활동으로 군대의 사회화가 요구 되었고, 최후에 군사 심판법에 3일내 법을 수정하는 내용의 군인의 심판 및 군법 체계를 전면적으로 민간 사법부로 옮기게 되었다.

1985 시민 행동연맹이 시작한 흰 셔츠 군 운동을 따랐으며 홍중치우의 사망 사건 발생 이후 사회운동은 폭발했다. 시위활동은 2번으로 나뉘어 진행되었고, 제 1차는 7월 20일 「국민 교육 징집 운동」시위, 제 2차는 2013년 8월 3일 「만인이 중치우를 보낸다(萬人送仲丘)」야간 집회를 진행하였다. (8월 눈 운동) 「흰 셔츠 군(白衫軍)」의 명칭으로 국민에게 1985행동 연맹은 「흰색 옷(白衣)」을 입을 것을 호소 하였고 「진상 규명」을 요구하였다. 이 활동의 특별한 점은 운동을 주체하는 뚜렷한 조직은 없었다는 것이다. 두 번의 과정은 완전히 국민의 자유적인 제안과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졌고 주요 인터넷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되었다. (특별히 대학생 BBS와 Face book등의 소셜 네트워크) 모두 25만 명이 참여했고 대만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국민의 자발적인 사회 운동이었다. 이는 인터넷 네트워크 연결이 새로운 형태의 항쟁이 되며 이는 대만 판 「재스민 혁명」으로 불리었다.

과거에 대만 총통부 앞에 국경일의 열병식 행진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본적 없는 대규모의 대중 시위 이었으며, 9할 이상이 20대의 젊은이였다. 군대의 폭력사건은 마잉주 정부와 젊은 세대 사이에 큰 원한을 만들었다. 그러나 마잉주는 변함없이 「일을 잘못 처리했으나 잘 처리했다고 생각 하는 식의 일을 잘 처리했다」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레임덕에 들어가는지 몰랐으며 이 당시 그가 연임하여 당선 된지 한 해가 지난 때었다. 대만의 민주화 이후(1988) 출생한 젊은 세대의 출생 이후에 자유민주의 사고방식은 그들이 병역의무 때에 국가폭력으로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이와 같은 강요된 공포감에 가두 행진 중에 마정부를 향해서 「싫다! (No!)」라는 큰소리를 나타내었다.

4. 318 해바라기 학생 운동

해바라기 학생 운동 또는 318학생 운동, 국회 점령 사건 등으로 불리며 2014년 3월 18일부터 4월 10일 까지 대만의 대학생과 NGO가 함께 시작한 국회 점령 항의 사건이다. 사건의 원인은 3월 17일 오후 내정 위원회 중에 집권당인 국민당의 입법 위원 장칭중(張慶忠)이 30초 만에 선포 완성된 《해협 양안 서비스 무역 협정(海峽兩岸服務貿易協議)》 심사에 한 무리의 대학생과 대학원생이 반대를 나타냈다. 18일 18시에 입법원 밖에서 「민주의 밤을 지키다(守護民主之夜)」는 야간 집회를 거행하였다. 항의는 경솔하게 진행된 심사 절차 때문이었고, 이후에 400명의 학생이 저녁 21시에 경찰의 봉쇄 선을 돌파하여 입법원 의사장을 점령했다.

26시간 내 입법원 외부에서 지지를 나타내면서 모인 1만 명의 민중 중에 대부분은 학생이었다. 입법원 의사장 점령에 참여하여 행동한 사람의 주요한 학생 지도자는 「흑색 섬나라 청년 전선(黑色島國青年陣線)」의 구성원 이며, 국립 대만 대학교 정치 대학원 대학원생 임페이판(林飛帆), 국립 칭화대학 사회 대학원 대학원생 천웨이팅(陳為廷), 웨이양(魏揚), 세신대학 사회 발전 대학원 대학원생 천팅하오(陳廷豪) 등이다. 외곽에서 지지하는 민중으로 하여금 「반 서비스 무역 협정 밀실 협상 민주 전선(反黑箱服貿民主陣線)」, 「1985 시민 행동 연맹(公民1985行動聯盟)」(이전의 홍중치우 사건 25만 명의 항쟁을 주도했던 단체)와 각종 사회 운동 단체를 따라 동원 되었다.

국회 의사 장소 점령 이후에 경찰당국은 긴급하게 경찰력 동원하여 배치하였고 항의하는 학생은 의자를 사용하여 의사당의 입구를 막아서 경찰 측의 진입을 막았다. 경찰 측은 여러 번 진입을 시도함과 동시에 국회 안의 인터넷을 끊고, 외부으로 소식 유출 막고, 화장실을 봉쇄하고, 의사당의 에어컨을 끄는 등의 의도적으로 회의장내의 학생을 쫓아내고자 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그 사이에 쌍방간 발생한 몸 싸움은 몇 명의 부상을 발생시켰고 이후에 쌍방의 대치형태로 놓이게 되었다.

3월 23일 저녁 19시 다른 대학생들은 부근에 있는 행정원 빌딩에서 충돌하였고 깨진 창문을 뚫고 들어와 5시간 동안 점거 연좌시위를 진행하였고, 24일 0시에 경찰 측은 학생들을 강제로 몰아내었다. 경찰은 폭력으로 학생을 진압하였고 많은 수의 부상자가 생겼으며 얼굴에 많은 피를 흘리는 사람, 쇼크를 일으켜서 부축을 받아서 현장을 떠나는 사람의 모습이 인터넷 상에 생중계되어 전국을 뒤흔들었다. 유혈사건의 발생은 당시의 행정원장(국무총리), 대만 대학교 정치과 교수 출신의 장이화(江宜樺)의 명령아래 진압된 진행된 것이었다. 장이화는 스스로를 자유주의 학자의 모습으로 표방하였었는데 이 사건을 통해서 그에 대한 학생들의 환상이 완전히 마음속에서 파멸하였으며 대학생들의 반정부 의지는 더욱 강력해졌다.

이후에 항의 자는 전 대만 민중에게 3월 30일 총통부 앞 카이다거란 대로(凱達格蘭大道)에서 연좌시위, 가두시위를 진행 하기를 호소하였다. 오십만명의 검은 셔츠를 입은 항의 자들이 총통부 주위의 보아이 특구(博愛特區)와 입법원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4월 6일 입법원장(국회의장) 왕진핑(王金平)은 국회 안의 학생을 위문하였고 양안 협정 감독 조례 초안을 입법을 통과하기 전에 양안 서비스 무역 협정과 관련한 정당간의 협상회의를 소집 하지 않게 약속하였다. 학생들이 왕진핑의 선의를 받은 이후에 항의 자는 7일에 10일 저녁 6시이 되면 국회에서 나가겠다고 선포했다. 이번 사건은 대만 역사상 국회 의사장을 점령한 최초의 사건 이다. 인터넷 매체를 통해서 현장의 실황을 중계하였고 국제적으로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대만 신세대의 자유성과 용기를 불어넣었고 괄목상대하게 되었다.

이번 대규모의 항쟁은 1990년의 야생 백합꽃 학생 운동 이후의 최대형 학생 운동이었다. 핵심 지도인물의 사회운동의 계몽은 2008년의 야생 딸기 운동으로부터 한국의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한국인의 항쟁정신을 배웠다. (몇 명의 학생운동 지도자는 모두 광주 항쟁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았으며, 저의 강의인 「한국인은 어떻게 과거청산을 했는가」에 대해서 들었다)

한 명의 꽃 가게 주인이 천삼백 수의 해바라기를 지지의 뜻으로 학생에게 보냈고 이 때문에 해바라기는 학생운동의 상징물로 변하였다. 해바라기는 태양을 대표하고 빛을 향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태양화로 불리는데 학생들은 이번 항쟁이 몰래 진행하는 서비스 무역에 대해 태양처럼 밝게 비추길 희망했다. 또한 대만의 미래가 해바라기 같이 태양을 향하기를 기대했다. 이번 태양화 학생운동은 충분한 준비 없이, 조직이 없이 체계적이고 질서 있게 진행된 운동이었다. 국회 점령 24일 동안 젊은이들은 새로운 종류의 「대만의 기적」을 창조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신세대는 그들의 미래의 강한 불안정감을 깨달았다. 324 국가 폭력은 처음으로 가두 시위를 나간 학생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일이었고 많은 사람이 부상당하고 유혈사건을 겪었으며 「민주화 세대」를 뒤흔들었다. 태양화 학생 운동은 전체 대만을 뒤흔들었다. 젊은 세대는 광분하였고 위 세대 또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 전민 교육은 모두에게 서비스 무역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었고 무엇 때문에 반대를 주장하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했다. 그리고 마정부가 이전에 중국의 위험에 대해서 전혀 경계심을 갖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전체 국민은 「자기의 국가는 반드시 스스로 지켜야 한다(自己的國家自己救)」라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의 오십만 명이 거리로 나와 시위 할 때 이번 학생운동은 단지 학생운동이 아니라 전국민의 대만을 보호하는 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14년의 태양화 학생운동의 도화선은 비록 서비스 무역 협정을 비밀리에 처리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었지만 이후 민중은 마정부의 친 중국 정책을 향한 집단 분노로 변하였다. 대만의 9할의 민의는 독립과 현상유지를 주장하는데 2008년 천운린 사건부터 2010년 ECFA(중국과 하나의 시장), 2014 서비스 부역 협정까지 현상은 계속해서 훼손시키고 빠르게 통일로 나아가고자 했다. 다행 이도 태양화 학생운동이 출현하여 이를 중지 시켰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의 앤드류 내이슨(Andrew Nathan)교수는 「학생운동은 중국이 추진하던 통일전선 전략에 막대한 좌절과 실패를 주었다」고 말했다.

이전의 운동과 가장 다른 점은 태양화 학생운동은 전국민의 지지를 얻었다는 점이다. 중산계급 또한 나서서 학생을 지탱하였고 그들은 국회의 점령은 위법행위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심지어 스스로의 자녀가 참여 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중산계급은 이번 학생운동의 지지의 원인은 국가의 장래의 위기감과 학생 운동 지도자의 태도에서 나타난 능력과 성숙도 또한 새로운 안목으로 젊은 세대를 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비스 무역 협정의 위험은 「하나의 중국 시장(一中市場)」을 구성하는 것과 경제의 통일을 통해 정치적 통일을 달성하는데 있다. 국민당은 국회를 다수로 장악하여 제도내의 방법으로 이미 국가가 멸망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는 학생들로 하여금 의회 장소를 점령할 수 밖에 없게 하였고 전체 국민이 주의하여 국가의 위기를 깨닫게 되었다.

임페이판(林飛帆)은 3월 30일 카이다거란 대로(凱達格蘭大道)에서 강연을 하였는데 「우리는 행동하였고 대만과 중국의 관계는 새로운 정의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정부에게 말합니다. 대만의 2300만에 포함되는 대만사람의 대만 미래는 우리 스스로가 결정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대만에서 가장 터무니 없는 일은 중국은 계속해서 대만을 강제로 합병하기(이름하여 「통일(統一)」)를 원하고 있고 대만의 총통은 「최종 통일(終極統一)」을 추진하고 있으나 9할의 민의는 통일에 반대하고 모두 통일과 독립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피하고 있으며, 마잉주는 이에 대해 더욱 무시하며 정치인 또한 적은 숫자만이 「저는 대만의 독립을 주장합니다(我主張台灣獨立)」라고 용기 있게 공개적으로 말한다.

임페이판은 1988년에 천웨이팅은 1990년에 태어났고 그들은 계엄이 해제된 이후의 민주화 세대이다. (대만은 1988년 장징궈(蔣經國)가 죽은 이후 민주화가 시작되었다) 생활과 성장에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으며 거짓말을 해야 하는 주위 상황도 아니었다. 그들이 학교에 다닐 때 교육개혁은 이미 시행한 때였다. 대만은 1990년대 교육 개혁을 시행하여 계엄 시기의 국민당 사상교육은 아이들을 억압하고 나쁜 영향을 안 끼쳤다. 태양화 학생운동은 20년의 교육개혁의 성과를 검수 받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새로운 교육은 참신한 대만인을 양성했고 이후의 20년 대만의 진보는 반드시 그들이 추진 할 것이다. 그러나 반 개혁의 보수세력은 결코 반격을 멈춘 적이 없다. 임페이판은 318 학생 운동은 단지 발단일 뿐이며 더 큰 도전이 아직 이후에 남아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만사람은 태양화 세대에 대해 미래에 속한 그들이 분명이 대만을 계속해서 앞으로 이끌어 나아갈 거라고 믿고 있다.

대만 사람들은 이 젊은이들을 이렇게 찬양한다. :

「 고맙다 태양화, 대만을 유지하고 발전할 수 있는 명맥!
고맙다 태양화, 대만을 마잉주 개인의 대중국 이데올로기의 횡포의 통제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고맙다 태양화, 대만 국민은 양안 정경유착 기득권자의 손에서 운명의 주도권을 쟁탈 할 수 있었다!
고맙다 태양화, 대만 국민은 민주자유 생활방식을 보호하고, 대만 앞길의 이천삼백만 명의 공동의 결정을 베이징 당국의 따돌림을 당할 필요 없게 되었다!」

  「感謝太陽花,台灣才能保住發展的命脈!
   感謝太陽花,台灣才能免於被馬英九個人的大中國意識形態強橫宰制!
   感謝太陽花,台灣人民才能從兩岸政商權貴手中,爭回命運的主導權!
   感謝太陽花,台灣人民才能保有民主自由生活方式,保有台灣前途由兩
   千三百萬人共同決定,不必橫遭北京當局的霸凌!」

대만의 태양화 학생운동 세대와 아랍의 봄의 젊은이는 같은 「분노의 세대」라고 불린다. 그들은 아시아를 뒤 흔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 모두 대만의 새로운 세대의 중국과 통일을 원하지 않는 것을 보았으며, 중국의 속국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마잉주와 함께 중국에 투항하는 것은 더욱 원하지 않는 것을 알렸다. 젊은이는 그들의 미래와 희망을 볼 수 없는 것에 분노하고 나섰다. 대만의 경제의 성장과 실속은 일반 국민에게 와 닿지 않으며 젊은 사람의 취업 기회는 더욱더 어려워 졌으며 월급은 점점 낮아졌다. 비싼 집의 가격은 그들로 영원히 살수 없게 되었으며 빈부 격차는 계속해서 커졌다. 이 항쟁 운동은 이들의 불만을 발산하였다.

마잉주 정권은 완벽한 계획도 없고 신중한 평가도 없이 고집대로 행정권을 남용하고 국회의 감독을 회피하고 「한 명이 결정한 전략이 전국에 손해를 끼치」고 있다. 2015년 참가한 아시아 기초설비 투자 은행(AIIB)의 참여 결정은 여전히 같았으며, 의향 동의서도 아직 국제적으로 합당한 절차에 의한 신청을 하지 못하고 있다. 마잉주는 대륙 위원회 통해 중국의 국무원 대만 사무실에 위임하였고 마찬가지로 국제상에 공개적으로 대만은 중국에 속한 일부로 승인하고 있다. 대만 국민이 노력하여 지키던 주권과 존엄은 하루 밤사이에 파괴되었다. 올해 3월 31일 흑색 섬나라 청년 전선(黑色島國青年陣線) 등 단체성원은 저녁 9시반 총통부에서 기습 항의를 하기로 했고 주권의 추락을 거절하고, 실질적인 평가 보고를 제출하고, 공개적인 잘차로 설명하고, 사회의 공통된 공감대를 만들고, 민의의 기초 부족, 중국과의 정경 체제를 합병하기를 중단하라고 했다.

5. 1129 선거 참패

홍중치우 사건의 25만 명의 항쟁으로부터 50만 명의 태양화 항쟁은 2014년 11월 29일 9항 지방 선거의 국민당 정권의 참패로 결과를 보여줬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6개 광역시 시장 선거 중 5개의 도시에서 패배했다는 것이다. 전 대만의 유권자는 투표를 통해서 마잉주 정권에 매서운 교훈을 주었고, 마잉주 총통의 레임덕을 앞당겼다. 선거 후 지금까지 마잉주는 이미 공개적인 활동을 자제하고 있고 그의 주변의 측근과 중요각료 또한 떠나기를 요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능력이 없고 인심을 얻지 못하고 또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문인 독재 총통」의 통치아래서 그를 위해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국민당은 실패의 이유를 한 단락 일로 여기고 있다. 국민당은 선거전 가장 마지막 주에 하나의 「반한(反韓)」광고를 내보냈는데 광고 목적은 민진당(民進黨)에 타격을 주기 위해서 였다. 광고 중에는 민진당이 국회에서 ECFA이 통과되지 못하게 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이 가장 좋아하며, 한국은 계속해서 몰래 비웃고 있다고 말하며 호소했다. 이 광고는 오히려 역효과를 조성하였는데 젊은 세대 선거 유권자의 큰 반감을 가지게 했다. (대만의 젊은 세대는 모두 한류 때문에 친한이다) 그러므로 국민당에서 빠져나가는 표의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이 많았다. 이 졸렬한 광고는 국민당 내의 더 이상 인재인 없다는 것을 보여주며, 얼마 없는 인재도 이런 국제적으로 비웃음이 되는 광고를 만들었다.

결론

모두들 왜 마잉주 정권이 이와 같은 곤란한 처지가 되었는지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뿌린 씨앗은 자기가 거둔다고 말 할 수 있다. 한국인은 「종북(從北)」(북을 따르거나 순종하는)을 사용하는데 이 어휘는 「친 북한(親北韓)」의 인물과 단체로 묘사 될 수 있다. 대만과 기타의 중화 문화권에서는 「종(從)」이라는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친(親)」과 「경(傾)」만을 사용하고 이전의 어떤 국가와 정권은 이를 모방하여 사용했다. 예를 들어서 「친일(親日)」(한국도 같은 어휘를 사용), 「경중(傾中)」(예를 들어 현재 대만의 마잉주 정부) 등.

한국어의 「종북(從北)」의 어휘는 저로 하여금 마잉주 정권에 응용하여 사용 할 수 있게 학습되었는데 「종중(從中)」정권으로 부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만의 중국인」(대만에 사는 화교)이고 뿐만 아니라 그들은 대만의 토지에 대해 감정이 없다. 계속해서 「친중(親中)」, 「경중(傾中)」, 「미중(媚中)」으로 일삼고 있는 모습은 그 정권의 정책은 더욱 「종중(從中)」(스스로가 흔쾌히 중국에 속한다)을 하고 있다.

한국 친구들은 하나의 「종중 정권(從中政權)」 어떻게 대만을 통치하는가?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는데 이것은 마치 남한에 하나의「종북 정권(從北政權)」 출현 하여 이에 스스로 흔쾌히 북한에 포함되는 것과 같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을 지나 우파를 막론하고 어째서 그들을 악의적으로 비난하는지, 그들은 단지 「우북(友北)」, 「친북(親北)」정권이고 아직 「종북(從北)」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만의 마정부는 한 치도 어김없이 하나의 「종중(從中)」정권 이다.

국민의 선거로 되는 총통이 자기가 한 「국가(國家)」의 총통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옆 대국에 속한 것으로 만족하며 그 대국의 어느 한 지방정부라고 인정한다. 바꾸어 말하면 만약 현재 북한이 중국과 같이 크다면 남한에 「종북정권(從北政權)」이 출현할 수 있는가? 당연히 이는 꾸며낸 가설과 허구적인 상상에 불과하지만 국정이 같지 않고 지정학적 정치도 같지 않은 대만과 남한이 유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모두 하나의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2차 세계대전 이후 70년동안 아시아에서 민주화를 성공시킨 국가는 한국과 대만뿐이다. 이는 우리가 인류와 세계에 데해 가장 위대한 공헌이다: 우리 「유교문화권」의 국가도 100% 서양식의 민주주의, 자본주의와 자유 선거제도를 실현 할 수 있다. 대만과 남한이 모두 이룰 수 있었고 리콴요의 싱가포르와 시진핑의 중국 또한 못할 이유가 없고 단지 차이점은 그들이 민주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는지 없는지의 차이일 뿐이다.

태양화 학생운동 후에 영향은 2014년 5월 하순 마카오의 「마카오 양심」 입법회 포위 항쟁 운동; 또 2014년 9월 26일 ~ 12월 15일 홍콩의 79일의 홍콩 중환지역 점거 우산혁명 등 특구 행정장관 직선제를 쟁취하기 위한 항쟁이었다. 아시아 분노의 새로운 세대는 우뚝 솟아서 분명히 아시아의 새로운 세대의 모습은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고 한자 문화권의 대만, 마카오, 홍콩 더 나아가 한국까지 (세월호의 참혹한 사건 이후의 시민 항쟁) 모두 이미 변화를 시작 했다. 싱가포르와 중국의 변화 또한 멀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대만사람은 같은 나라의 사람에게 국가 폭력을 행사하거나 또는 국민이 적으로 삼은 지도자, 국가주권과 존엄을 다른 나라에 판매하는 총통, 가장 마지막에는 틀림없이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으며 모두가 이렇게 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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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E VIOLENCE AND HUMAN RIGHTS IN TAIWAN UNDER "THE CHINA-OBEDIENCE (종중, MA YING-JEOU) ADMINISTRATION"

Presenter: Rick Chu
Founder/CEO of the Korean Studies Academy, Taiwan
Kaohsiung City Government Human Rights Committee member
2015/5/15, Gwangju, World Human Rights City Forum


First of all, I'd like to express my highest regard for former president Kim Dae-jung. The level of great respect Koreans have for him is evident by the fact that this international convention center is named after him in his honor. This is not my first time here at the KDJ Convention Center, but this time around the feeling is particularly poignant given the recent passing of Asia's last autocratic dictator — former Singaporean prime minister Lee Kuan Yew, two months ago; a comparison between him and Km Dae-jung works only to accentuate the latter's greatness.

12 hours after Lee Kuan Yew passed away on March 23, I dug out an article by Kim Dae-jung that was published in Foreign Affairs in December, 1994, titled "Is Culture Destiny? The Myth of Asia's Anti-Democratic Values." I was the one back then who translated the article into Chinese, and included it in the appendix of the Chinese-edition of the "Mass Participatory Economy" published in February, 1998.

To my great surprise, less than a day after I posted an excerpt of that article on my Facebook page, it was "shared" and reposted by more than 300 netizen, among whom about twenty percent send me Facebook friend requests. The article, rebutting Lee Kuan Yew's claim that "western democracy is inapplicable in Asian societies," was one of the few Chinese translated pieces of Kim Dae-jung's work that not only was eye-opening for readers in Chinese-speaking world such as Taiwan, Hong Kong and Singapore, but also presented them with view that's finally different from the usual eulogy which main-steam Chinese media outlets often heap on Lee Kuan Yew. This voice of criticism, coming from an opposition political figure in Korea that shares the Confucian cultures and has a successful democratization, is particularly convincing with Chinese-language readers.

I was the only one in the Chinese-speaking circle who dug out Kim Dae-jung's old article and present it. It's regrettable that from Korean websites, I could only find one report by a Polinews reporter, an in-depth analysis that made a comparison among Lee Kuan Yew, Park Chung-hee and Kim Dae-jung. Following Lee Kuan Yew's passing, not only were there no reports on Kim Dae-jung's criticism of Lee Kuan Yew by mainstream Korean media outlets, there were also no relevant comments from members of liberal democrats in Korea. Amid my disappointment, I can't help but wonder whether, under a conservative administration, the public no longer recognizes South Korea as a democratic country? And therefore wipe clean Kim Dae-jung's contribution and achievements? Such is very unfair to Mr. Kim Dae-jung.
On the other hand, Japanese media outlet Weekly Toyo Keizai, after noting my Facebook post, its deputy editor-in-chief Keisuke Fukuda published an article that made an in-depth comparison of three Asian leaders — namely Kim Dae-jung, Lee Kuan Yew and Lee Teng-hui. In the piece titled "Lee Kuan Yew who stirred up a debate with his interpretation of 'Asian values'," the author cited Kim Dae-jung's words in noting that "Asia has a rich heritage of democracy-oriented philosophies and traditions, and that Asia has already made great strides toward democratization and possesses the necessary conditions to develop democracy even beyond the level of the West." The article then concluded with Lee Teng-hui's statement that "Lee Kuan Yew's interpretation of the 'Asian values' was greatly influenced by feudal Chinese thoughts, which, upon leaving Singapore, would not be accepted by people elsewhere in Asia."

This comparison made by the Japanese media highlights the wisdom and greatness of Kim Dae-jung and Lee Teng-hui, it also proves that Korea and Taiwan, both of Confucius cultures, can 100 percent implement the western democracy and free electoral system, and that there's no reason that Singapore and China cannot.

Late renowned US political scientist Samuel Huntington had also once said that the democratic system implemented by Lee Teng-hui in Taiwan will live on after him but the system built by Lee Kuan Yew will disappear once he is gone. Per Lee Kuan Yew's comment, "history will be the judge" of Huntington's statement.

As a matter of fact, as today we look back on the Era of “Developmental Autocracy” we went through, history has already made its judgment and ascertained that "the Lee Dynasty/Chiang Dynasty/Park Chung-hee" were of dictatorial authoritarian rule, whereas "Lee Teng-hui/Kim Dae-jung" made democratic achievements that earned Taiwan and Korean world recognition.

Yet, the irony is that the road to democracy is not a straight path but one full with twists and turns; Taiwan and Korea, after undertaking liberal democratic regime for twenty years and ten years respectively, are both experiencing a regression of democracy following the comeback of conservative administration. The regression of democracy in Korea under the conservative administration saw incidents such as the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s violation of administrative neutrality in 2012 in the presidential election, the man-made error in the sinking of ferry the Sewol in 2014, and the forceful dismissal of political parties. All these anti-democratic cases need not further elaboration from me here as I believe Korean friends know about all these clearer than I do. What I would like to share with you here is that Taiwan, in the past seven years, is also going through a comeback of conservative administration, and that despite his approval rating dipping to the low of mere 9 percent, the Ma Ying-jeou administration continues to go against the public opinion, stand opposed to the people and infringe people's human rights.

1) The Wild Strawberry Movement

The Ma Ying-jeou administration took on a pro-China stance soon as Ma assumed the presidency in May 2008. Half a year later on November 3 during the Taiwan visit made by China's top official for Taiwan affairs Chen Yunlin, the Ma government, in welcoming the Chinese envoy, employed numerous measures to protect him from being in a close contact with Taiwanese protesters. During Chen Yunlin's stay in Taiwan, the police, under the pretense of security concern, resorted to various means such as dispelling, restricting and arresting of people who voiced different opinions as well as confiscating their belongings. The most ridiculous among them all were incidents of police boorishly snatched away the Republic of China flags from people's hands and confiscated them. In other words, people were not allowed to wave their national flags in their own story. In order not to incur the wrath of his guest, Ma Ying-jeou employed almost every mean to throttle people's basic freedom and human rights.

The Ma government's various encroachment of human rights prompted sit-in protest by university students, professors and members of the general public. Starting November 6 till January the following year, thousands of protesters, via online social media platforms, echoed the students' call by either staging sit-in or holding demonstrations in front of the Executive Yuan, at the Liberty Square or on campus nationwide in protest of the government's "abuse of administrative power, encroachment on human rights and the constitutional violation of the Assembly and Parade Act." The protesters also demanded "an open apology from President Ma Ying-jeou, and resignation from National Police Agency Director-General Wang Cho-chiun." The series of protests came to be known as the "Wild Strawberry Student Movement" — the largest scale of student protesting movement in 18 years since the 1990, also known as the "1106 protest against the Assembly and Parade Act and fight for human rights."

Although no death was reported throughout the protests lodged by students and the general public, the bloodshed resulted from police's abuse of power came as a great shock to the young generation born after Taiwan's democratization, and had left with them a great impact. Because until then, they have not witnessed state violence that trampled on freedom, democracy and basic human rights to such a coarse level. One biggest problem exposed in the process was the Assembly and Parade Act that required advance permission from the authorities to hold assembly and parade, placed restriction on protesting areas, and provided police with the authority to order protesters to dispel and/or be faced with administrative punishment. All these provisions are outdated and unfit for this era of democracy, and yet the Ma government keeps on employing this dated law to oppress people's freedom of expression in the era of democracy.

As a result of the series of protests, Ma Ying-jeou, in less than one year after assuming office, has lost people's trust and that his popularity had also since plummeted. In light of his low approval rating, Ma attempted to turn his poor governance around by instead forcibly working to strengthen cross-strait economic ties. In 2009, the Taiwan government proposed to China to sign the Cross-Straits Economic Cooperation Framework Agreement; on June 29, 2010 in Chongqing, China, both sides inked the first agreement and began subsequent negotiations on issues such as cross-strait cargo services, cross-strait service trade, cross-strait investment guarantee agreement and cross-strait trade dispute resolution agreement.

These agreements, tantamount to the free-trade agreements (FTA), however did not undergo decade-long discussion, negotiation, amendment and communications with the public and the legislature and obtain majority consensus before signing as Korea had done with the US and China in their inking of the FTAs. From Ma Ying-jeou's presidential campaign in early 2008 mentioning the ECFA to the actual signing of the cross-strait agreement, it took less than two-and-a-half years to complete. Such radical China-leaning action led to more resentment toward Ma from members of the general public who received no economic gains from the inking of the cross-strait agreement. Supporting Ma from behind are the ones stand to benefit from the agreement, a handful of businessmen who conduct business and made investment in China, the so-called members of the "cross-strait political-business crony group."

2) Anti-media Monopoly Movement

Amid public skepticism over Ma Ying-jeou's pro-China stance, in 2012 the Wang Wang Group, a Taiwanese company that made fortune by selling rice crackers in China, acquired the financially struggling China Times Group with NT$ 22 billion. The fact the China-based Taiwanese company was able to conduct the media buyout with such an enormous cash has led many in the Taiwan pubic to suspect a financial support of Beijing's State Council from behind to make the deal even possible.

After becoming the new owner of the media group, Want Want China Times Group chairman Tsai Eng-meng, in an interview with the Washington Post, said that the crackdown on the protests at Tiananmen Square in Beijing in 1989 was "no massacre." Tsai's claim was more brazen than China's mouthpiece People's Daily and enraged many Chinese democracy activists. Tsai's remarks also shocked many Taiwanese intellectuals, whom in return issued statements and called for boycott of the China Times as they suspected the possibility of the government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interfering with Taiwan's democracy via Taiwanese conglomerates such as the Want Want China Times Group.

Subsequently on July 31 the same year, student groups including ones at the National Taiwan University and the National Tsing Hua University formed an organization named the Youth Alliance Against Media Monsters. Nearly 700 students called upon by the organization gathered in front of the CtiTV, part of the Want Want China Times Group, and protest over the Want Want China Times Group's unfair reportage. The protesters, chanting slogan that said "I am a student, I am against the Want Want China Times Group," formally pledged their participation in the Anti-media monopoly movement.
The Anti-media monopoly movement, also known as "the Anti-media monster movement," was a joint student and social movement launched in 2012. The 901 Anti-media Monopoly Alliance and the Youth Alliance Against Media Monsters — made up by student groups from various universities and colleagues nationwide — were the main organizations behind the movement. Their appeals included opposition to the Want Want China Times Group's purchase cable television services, the Want Want China Times Group's buyout of the Next Media Group and a demand for a legislation of a media anti-monopolization act. Among the main appeals also included the safeguarding of Taiwan's freedom of press, opposition against media monopoly, and prevention of Taiwanese media outlets from being controlled by Chinese capital and Taiwanese conglomerates.

On September 1, Taiwan's Reporters' Day, nearly 100 civic groups took to the street under the lead of the Association of Taiwan Journalists in protest against media monopoly. The protest marked a rare joint alliance between social and student movements, given the participation of civic groups as well as the Youth Alliance Against Media Monster. More than 20,000 people took part in the demonstration, the largest protest in Taiwan's history that aimed at one single media outlet, which was also the first time where media issue was at the center of civic movement in Taiwan. The demonstration ended in peace, with no incident of clash nor bloodshed. This Chinese-capital media outlet has awakened Taiwanese people's alertness that, without the import of China's People's Daily, there's already Beijing's proxy in Taiwan. If it wasn't for the Ma Ying-jeou administration's pro-China stance, Chinese penetration of Taiwan would not be able to make infiltration into Taiwan's media.

Korean friends can think about it and imagine the scenario if North Korea were to have its capital made inroads in South Korea and conducted a buyout of the mainstream newspapers such as the Chosun Ilbo to become its Nodong Sinmun (Workers' Daily) and therefore its mouthpiece in South Korea. Will South Korean friends find this acceptable? It's be like The Fifth Column during the Spanish Civil War. The fact is, not only the Taiwanese media, but all arenas in the Taiwan society have been infiltrated. The pro-China Ma Ying-jeou government created this sense of distorted values among the people in Taiwan in which they can't tell enemy apart from their own; as for people serving in the Taiwanese military, they have also been compounded by a feeling that they do not know who and what they are fighting for.

3) Human rights abuses in the military

This was a case of death of an army corporal in Taiwan. Hung Chung-chiu was initially scheduled to be discharged from the military on July 6, 2013. He however died on July 4. The case drew public attention because the cause of his death was a result of military scandal in which he allegedly suffered agonizing pain from accumulated “inhumane physical punishments” that led to his death. In an administrative investigation report published by the Ministry of National Defense on July 15, it named the army's 542nd Brigade and the 269th Brigade of negligence in the process of keeping Hung Chung-chiu in confinement.

At the end of June before Hung Chung-chiu was to be discharged after completing his year-long compulsory military, he was accused of violating rules pertaining to military information security for bringing a camera-equipped cell phone and an MP3 player onto his base. After the case went under review by the military's disciplinary and evaluation committee, Hung Chung-chiu was transferred to the 269th Brigade for a confinement as a punishment. Hung Chung-chiu, 98-kilo in weight, underwent physical drill in extreme hot weather on July 3 and the following day died of heat exhaustion after excessive punishment.

The case drew great public attention because it involved the issues of human rights in the military and the jurisdiction of the Military Prosecutor General's Office. It also prompted the launch of the activist group Citizen 1985 which went on and staged two mass demonstrations demanding the military reveal the truth about Hung Chung-chiu's death and calling for the government to push for better protection of human rights in the military. Because of the protests, Code of Court Martial Procedure was amended three days later that allow service personnel to be tried in civilian courts in peace time rather than by court-martial.

The "White T-shirt" movement launched by the Citizen 1985 was a social movement erupted following the death of Hung Chung-chiu in the military. Two demonstrations were staged, one was a march held on July 20, and the other was a mass protest held on August 3, 2013. The protesters, were known as the “white shirts," because they all wore white T-shirt in the protests demanding the military reveal the truth about Hung Chung-chiu’s death. People who took part in the protests did not have affiliation with any particular groups, as both times the demonstrations were organized through online social media platforms such as the Bulletin Board Systems (BBS) in universities and the Facebook where people attended the protests on their own initiative. A total of 250,000 people participated in the protests, the largest scale of social movement in Taiwan's history where members of the general public came forward to take part in the demonstration on their own initiative. This demonstration, where protesters came together via online communication, had also been called as Taiwan's version of the "Jasmine Revolution."

In the past, except for the Double Ten National Day where military display were staged, there weren't such a crowd seen in front of the Presidential Office, let alone a mass demonstration in which more than 90 percent of participants were twenty-something young people. The case of violence in the military instilled a profound bitterness between the Ma Ying-jeou administration and the young generation. Despite so, Ma Ying-jeou still feels good about himself and is totally unaware of how he is already on the path of becoming a Lame Duck —and all these occurred just within one years of his re-election. The young generation, born after Taiwan's democratization (1998), possesses an innate sense of democratic values. They cannot tolerate the state violence that makes them lost their lives while doing their compulsory military service. This fear drives the young people to the street and say "No" to the Ma government.

4) 318 Sunflower Movement

The Sunflower Movement, also known as the 318 Student Movement or the Occupying Legislature Incident, refers to the occupying of the legislature from March 18, 2014 to April 10, 2014 by Taiwanese university students and members of the non-governmental organizations. It stemmed from the meeting of the legislative Internal Administrative Committee in the afternoon on March 17, 2014. During the meeting, Chinese Nationalist Party (KMT) Legislator Chang Ching-chung rammed through review of the controversial cross-strait service trade agreement in mere 30 seconds, prompting indignation from group of university and graduate students. The students held an evening rally titled "Night of Safeguarding Democracy" on March 18 at 6 pm in protest of the reckless and flippant manner in which legislative review was conducted; about 9 pm about 400 students broke through police's blockage and occupied the Legislative Yuan's main chamber.

Within the following 26 hours, some 10,000 people, mostly students, gathered outside the Legislative Yuan in support of the occupation. Among the main students leaders in the occupying-legislature action were members of the Black Island Youth Alliance, including graduate student of political science at National Taiwan University Lin Fei-fan, graduate student in sociology at National Tsing Hua University Chen Wei-ting, Dennis Wei and Shih Hsin University graduate student Chen Ting-hao. Supporters who gathered outside the Legislative Yuan included members of the Democratic Front Against Cross-Strait Trade in Service Agreement, the Citizen 1985 and various social movement groups.

After the occupation of the legislature, the National Police Agency urgently dispatched police force to the Legislative Yuan. The police however were unable to enter the main chamber due to chairs and various furniture that the student protesters used to block the entrances to the chamber. In an attempt to force the students out of the venue, the police resorted to numerous methods such as locking down internet access inside the chamber to block the students from issuing information to the outside world, shutting down electricity and turning off the air-conditioning inside the chamber as well as closing down the toilets. But all to no avail. As standoff between the student protesters and police ensured, sporadic physical scuffles took place that resulted in some being injured.

At 7 pm on March 23, another group of students stormed to the nearby Executive Yuan compound and broke into the building, where they staged a sit-in protest for about five hours before being forcibly dispelled by the police at around midnight. Police violence and brutality in the process resulted in many injured, and the whole country was in shock as images of inured having their faces covered with blood while a few other passed out were broadcast via online live feed. The bloodshed happened because of directive issued by then-premier Jiang Yi-huah, formerly a political science professor at National Taiwan University, to disperse the protesters from the Executive Yuan compound. Since then, Jiang, who self-labeled a liberal academic, had his image shuttered in the opinion of the students; the university students' anti-government will was further fortified in view of the police's use of violence against the student protesters.

The protesters subsequently called for members of the public to stage a sit-in on the Ketagalan Boulevard in front of the Presidential Office on March 30. On that day, 500,000 black-clad protesters swarmed in the areas around the Presidential Office and the Legislative Yuan, all located within the Boai Special District (which has a high concentration of government buildings). On April 6, Legislative Speaker Wang Jin-pyng visited the students at the legislature's main chamber and promised he would not convene negotiation of all legislative caucuses on the issue of cross-strait service trade agreement until a legislation on the monitoring of cross-strait agreements is enacted. The students felt Wang Jin-pyng's goodwill and announced on the evening of April 7 that the protesters would clear out of the legislative chamber at 6 pm on April 10.

This event marked the first time in Taiwan's history that the legislature's chamber was occupied by members of the public. Throughout the process via live stream video and broadcast, Taiwan's young generation also wowed the world with their display of courage and independence in partaking civic engagement.

This grand-scale protest was the largest student movement since the Wild Lily Student Movement in 1990. The inspiration for social movement among the core leaders of the Sunflower movement originated from the Wild Strawberries Movement in 2008, as well as the G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 from which they learnt of Korean's fighting spirit. (Some of the student leaders in the Sunflower Movement had also watched the film ”May 18 (화려한 휴가)” that depicted the Gwangju Uprising , as well as heard of my speech on "how Koreans rectified their past.")

Sunflower became the symbolic representative of this student movement because a flower shop-owner delivered 1,300 flowers to the students during the protest in support of their appeals. Sunflower symbolizes positivity and brightness , which echoed the students' wish that the protest could "shine light" on the government's "black-box," or opaque, handing of the cross-strait service trade agreement; the flower also represented the expectation the students had for Taiwan that it could be like the sunflower, turns to follow the sun. These young people indeed achieved a new alternative kind of "Taiwan miracle," for the fact that the Sunflower student movement started out with no sufficient preparation nor organization, yet the student protesters were able to occupy the legislature's chamber for 24 days, with orderly operation throughout this period.

The awakening of this new generation stemmed from the sense of strong uncertainly they felt about their future. The young people of this "democratic generation" were stunned by the state violence against the student protesters during the 324 protest that resulted in bloodshed and injuries of many. Meanwhile the Sunflower student movement also shocked the whole Taiwan, one that captivated the young generation, and touched the hearts of the many of the elder generation. It was an education for all, from which members of the public realized not only why they needed to oppose to the cross-strait service trade pact, but also became aware of the Ma government's lack of alertness in the face of China's threats. Due to the Sunflower Movement, the people become conscious of the notion that "one must safeguard one's own country." When 500,000 people swamped to the streets, it was no longer a mere student movement, but a "Save Taiwan Movement" engaged by all members in the Taiwan public.

Although the 2014 Sunflower Movement stemmed from people's opposition to the government's "black-box" handling of the cross-strait service trade pact, it in fact also manifested the public's collective anger of the Ma government' China-leaning policy. 90 percent of the people in Taiwan favor independence and/or maintaining statue quo; yet from the Chen Yunlin Incident (oppression of national flags) in 2008, the signing of the ECFA (one-China market) in 2010, to the proposed cross-strait service trade agreement ("a black-box" operation) in 2014, the nation's statue quo is in fact constantly being damaged all the while fast propelling toward the direction of unification (with China). It was fortunate that there came about the Sunflower student movement to put a brake to the matter. As Columbia University political science professor Andrew Nathan noted, "China's 'united front' tactic to bring Taiwan under its fold suffered a great setback because of the student movement."

Different from the movements in the past, the Sunflower student movement won the support of the general public. Even people of the middle-class rank came forward in support of the students and cared not that the action of occupying the legislature was in itself an illegal act; many, on the other hand, took pride that their children participated in the movement. The support from the middle-class for the student movement this time around suggested they, too, felt a sense of crisis in term of the nation's future; meanwhile, they had also been awed by the level of maturity and competency displayed by the student movement leaders.

The danger of the proposed cross-strait service trade pact lies in the fact that it seeks to construct a "one-China market," through which allowed for an economy unification to pave way for an eventual goal of political unification. As the KMT held the majority in the legislature, a dependence on effort to take the matter from inside the system no longer was enough to stop the nation from falling further into the pit. The students therefore were forced to take the action of occupying the legislature in order to draw public's attention to the danger faced by the country.

In a speech made on the Ketagalan Boulevard during the March 30 protest, Lin Fei-fan said: "Our action defines a new Taiwan-China relations. We want to tell the government that Taiwan's future belongs to its 23 million people. Taiwan's future should be decided by us [Taiwanese people.]" In Taiwan, the most ridiculous thing is that China has always wanted to annex Taiwan (under what it called an unification), and that the president of Taiwan also keeps on wanting to push for an "eventual unification," whereas 90 percent of the people in Taiwan oppose to unification. Ma Ying-jeou however is oblivion to that pubic opinion; few politician also dare not to publicly proclaim that "I support Taiwan independence."

Lin Fei-fan was born in 1988 and Chen Wei-ting was born in 1990; both belong to the "Democratic Generation" during which the Martial Law had been lifted (Taiwan began democratization in 1988 after the death of Chiang Ching-kuo), and that the environment they grew up was fear-free. Taiwan's education had already undergone reform when they began schooling. The educational reform in Taiwan in the 1990s freed the children from the toxic KMT-trend of thoughts that was otherwise omnipresent during the Martial Law era. The Sunflower student movement could be said as one that showed forth the result of the nation's education reform these past twenty years. New education cultivated brand-new Taiwanese, and they will be the ones propelling Taiwan's progress forward in the coming twenty years. However, the anti-reform conservative power has not stopped. Per Lin Fei-fan's remarks, the 318 student movement is just the beginning, there are bigger challenges ahead. But Taiwanese have confidence in this "Sunflower Generation," the future belongs to them and they will lead Taiwan forward.

In the wake of the Sunflower Movement, some have these praises for the young people:

"Thanks to the Sunflower, Taiwan was able to safeguard its development!
Thanks to the Sunflower, Taiwan was able to avoid being controlled by
Ma Ying-jeou's personal great-China ideology!
Thanks to the Sunflower, Taiwanese people were able to snatch back the
control from the hands of the cross-strait "privileged bunch" and be the
masters of their own lives!
Thanks to the Sunflower, Taiwanese people were able to keep their free
and democratic living style, and that Taiwan's future remains in the decision
of its 23 million people, free from Beijing authority's bullying!"

People partaking in Taiwan's Sunflower student movement, like the young people in the Arab Spring Uprising, have been termed "an angry generation." They not only stunned Asia, but also allowed for the world to see that the young generation in Taiwan wished not to unify with China nor become China's dependency, let alone to surrender to China under Ma Ying-jeou's lead. These young people stepped forward because they were angry that they saw no future nor hope in sight. Ordinary people in Taiwan do not feel economic growth nor benefit from it; the young people are faced with the situation where employment opportunity is getting harder all the while the wage is getting lower; the gap between the rich and the poor is getting wilder and that they could never be able to buy property because of the high housing price. They took part in the protest to vent their grievance.

Ma makes one-man decision-making at the expense of the country, in which his administration also abuses administrative power, shuns legislative supervision and proceeds poorly thought-out policy that lacks careful assessments. This decision-making style of the Ma government was once again in pathetic display this year in its handling of the country's application to be the founding member of China's proposed Asian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 (AIIB). Departing from the international norm of submitting a letter of intent, Ma Ying-jeou instead had the Mainland Affairs Council submitted the letter of intent to China's Taiwan Affairs Office, an action that tantamount to openly admitting that Taiwan is part of China, and overnight destroyed Taiwan's sovereignty and dignity which Taiwanese people have strived so hard to uphold. As a result, on March 31 around 9:30 pm, members of the groups such as the Black Island Youth Alliance, without prior notice, staged a protest in front of the Presidential Office, demanding the government to cease its self-degrading behavior, be transparent in its policy-making and refuse economic integration with China until there is a public consensus on the matter.

5) The 1129 electoral defeat

From the 250,000 people who took part in the demonstration over the Hung Chung-chiu case to the 500,000 people partaking in march during the Sunflower student movement, the KMT eventually was bruised in the nine-in-one local election on November 29, 2014. Among the important mayoral election for the nation's six special municipalities, the KMT lost five. In other words, the voters in Taiwan taught the Ma Ying-jeou administration a lesson with their ballots, and making President Ma Ying-jeou a lamb duck way ahead of the schedule. Ma has since the elections made less public appearance, and a number of his close aids and important Cabinet members have also since resigned. No one wanted to work under a "dictatorial president [of civilian background''] who is incompetent, unpopular and handles issues in arbitrary manner.

There was an episode to the KMT's electoral defeat. One week before the Election Day, the KMT introduced an "anti-Korea commercial," which accused the Democratic Progressive Party (DPP) of stalling the nation's development. The TV commercial described that South Korea — which has just reached a consensus with China on a free-trade agreement — was glad that the DPP boycotting the passage of ECFA in the legislature. This commercial backfired however and was frowned upon by many young people (all things Korean have been popular among the young generation in Taiwan because of the "Korean Wave" phenomenon). As such, the KMT had lost quite a number of votes in the election. This shabby TV commercial suggested there were no talents within the KMT that it was at its wit's end to produce such a commercial and made itself an international laughing stock

Conclusion

Up to this point, people may now have an idea as to why the Ma Ying-jeou administration is in such an embarrassing and embattling state. It could be said that it's Ma's own making that he brings on himself to this situation.
  
Koreans use the term "종북" to describe "pro-North Korea" people and groups. In Taiwan and else Chinese-speaking circles however, we don't use the word "종". Instead, we use "pro-"(親,친) or "leaning"(傾,경) to describe a country or a government administration's tendency. For example, "pro-Japan(親日,친일)" (a term also used by Koreans), and "China-leaning(傾中,경중)" (as in the case of the Ma Ying-jeou administration in Taiwan).

From this Korean term "종북," I've learnt that it is also applicable to the Ma Ying-jeou government, and therefore I called it a "China-obedience (종중) administration. Reason beings that he is "a Chinese in Taiwan" (an overseas Chinese living in Taiwan); he cannot identify with the land of Taiwan, and further more, he has been padding himself on the back for being "pro-China," "China-leaning" and "currying favor with China." His administration's policy is simply "종중" (willingly to become a China subsidiary).

Korean friends may find it hard to imagine how could a " China-obedience(종중) government" rule over Taiwan? This is just like if there emerges a "North Korea- obedience(종북) government" in South Korea in which the latter willingly becomes a subsidiary of the North Korean regime. In the past, no matter how the far-right extremists attacked the Kim Dae-jung or the Roh Moo-hyun administrations, they could at most only be described as "North Korea-friendly (우북)" and "pro-North Korea (친북)" administrations, and not the point of being called " North Korea- obedience(종북) administrations." The Ma Ying-jeou administration in Taiwan today however, is purely and simply a " China-obedience(종중)" administration.

A president directly elected by the people and yet does not see himself as a president of a "country" but instead willingly regards himself as a subsidiary to the neighboring big country and takes himself as a local government to that big country. In other words, if today the North Korea is as big as China, would " North Korea- obedience(종북) administration" appear in South Korea? Of course this is just an "if" question, a hypothetical supposition. Taiwan should not be put in comparison with South Korea because they have different national conditions and different geopolitical stances.

However, what we can not deny is the fact that, in the 70 years after World War II, Korea and Taiwan are the only two countries in Asia that achieved successful democratization. This is our greatest contribution to the world and the mankind. It turns out, countries from "the circle of Confucius culture" can, too, implement 100 percent western democracy, capitalism and free electoral system. Since Taiwan and South Korea can do it, Lee Kuan Yew's Singapore and Xi Jinping's China have no excuse not to; the only difference lies in whether they have in possession with them democratic disposition.

The Sunflower student movement also has an influence over Macau's "Macau Conscience" besieging-the-legislature movement in late May, 2015; it also influenced the "Occupy Central" campaign and the "Umbrella Movement" in Hong Kong that took place from September 26, 2014 to December, 15, 2014. The emergence of Asia's "Enraged Generation" is poised to usher in a new phase in Asia; changes are underway in the Chinese Characters-culture societies in places such as Taiwan, Macau, Hong Kong, and even Korea (the protests in the wake of the sinking of the Sewol ferry), and that it'd only be a matter of time for changes to start taking place in Singapore and China. Besides, it is to Taiwanese people's belief that, a president who employed state violence against his own people and sold out national sovereignty and dignity will eventually face a trial by the people. Let's all wait and s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