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반한정서의 연원과 대책
 
 
문화외교의 관점에서 본 대만의 반한정서에 대한 연원과 그 대책

대만 지한원(知韓苑)대표 주리시(朱立熙)

1. 대만 반한(反韓)정서의 연원

(1) 단교(斷交)의 배경


1980년대 이후 한국정부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6˙23선언>(1973년)에 이은 <북방정책> 추진에 가속페달을 밟으면서, 그 동안 대만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중국과 가까워지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대만은 어찌 해 볼 도리 없이 조만간 맞이하게 될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대만-한국 관계가 이러한 긴 변화 과정 속에 놓이게 된 데는 대만이 자체의 국가정체성 문제로 인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경직된 외교노선을 수정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가장 큰 책임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만 스스로 ‘하나의 중국’ 원칙을 포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방국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므로, ‘신의를 저버렸다’ 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무릇 한 나라의 외교정책은 ‘국익추구’를 최우선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들의 국익과 대만의 국익이 충돌하였을 때, 자국의 이익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시 말해, 대만이 그들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대만 역시 그들과 같은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대만-한국 관계에 변화가 발생한 것은 1980년대의 대만사회가 이미 다원화된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정보의 교류가 빈번해지기 시작하고 국민의식 또한 성숙해질 무렵이었다. 때문에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하는 가운데, 설령 대만이 자신의 외교정책에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것을 안다손 치더라도, 대만의 입장에서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실은 지난날 아시아의 대표적 반공국가로 형제의 정을 나누던 두 나라가 어째서 이별의 길을 가야 하는가 라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대만인들은 조만간 그들을 떠날 것이라는 한국의 거듭된 입장표명을 보면서 정서상 서운한 감정을 떨쳐버리기에는 그 반발심이 더욱 강렬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바로 1983년 5월5일에 발생한 ‘중공민항기 납치사건’ 이었다. 당시 대만 언론에서는 이를 ‘6의사(義士)사건’ 이라 칭하였다.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한국과 중국의 관계 진전이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하였지만, 한국과 대만의 관계에는 말할 수 없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사건 발발 후 약 1년 3개월 동안 대만-한국 관계에서 유일하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던 부분은 이 기간 동안 한국의 정책에 대해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후로 대만-한국 관계는 급격하게 나빠졌다.

‘6의사 사건’ 기간 동안 대만인들은 이어지는 언론보도를 통해 한국정부가 대만의 ‘반공귀순 의사’를 능욕하는 것을 보았다. 이로써 분위기는 더욱 격앙되었고, 거센 ‘반한정서’가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당연히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억울한 측면이 있다. 한국은 국제협약을 이행하고 6명의 비행기 납치범을 사법처리 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대만은 애초에 국제법상의 지위가 없었던 데다가 당시 반공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대만인들로서는 국제법상의 의무가 두 나라 간의 전통적인 우애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을 한국측에서 간과한 것은 분명하다. 반한정서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대륙과 대만을 막론하고)들은 한국인(또는 조선인)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중화의식’을 바탕으로, 중국인들은 과거 자신의 속국이나 다름없던 반도의 사람들에게 선천적인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국민당의 의식교육을 받은 많은 대만인들은 난징(南京) 국민당 정부가 한국에 대하여 상해임시정부를 지지한 큰 공이 있으며, 한국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들은 또 전후 장제스(蔣介石)의 한국 독립 지지 및 김신(金信) 주중화민국대사와 장제스 간의 ‘의부자(義父子)’ 관계로 인해, 중화민국과 한국의 관계는‘종주국과 속국의 관계’ 에서‘부자관계’로, 전후에는 다시‘형제관계’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아우’인 한국이 되려 ‘형님’을 얕보고 있으니, 선천적인 우월의식에 후천적인 피해의식이 더해지고 양자가 서로 부딪히면서 대만인들의 반한정서는 자연히 더욱 더 고조되었다.

(2) 반한정서의 연원과 단교

1992년 8월19일 오후, 대만 입법원(立法院,한국의 국회에 상당) 외교위원회 위원들은 외교부로부터 첸푸(錢復) 외교부장이 직접 브리핑에서 중대사항을 발표할 것이라는 갑작스런 통지를 받았다. 이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국회와 언론은 신경이 곤두섰다. 그 중대사항이라는 것은 한국이 8월 24일에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것이며, 동시에 대만과 단교할 예정임을 노태우 정부가 이미 대만 측에 통보하였다는 것이었다. 첸푸는 브리핑에서 ‘한국에 기만 당했으며, 한국이 배은망덕하고 신의를 저버렸다’고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단교 소식을 대만 당국이 먼저 발표한 것은 과거의 단교 사례와는 확연히 달랐다. 단교소식이 타이베이에서 서울의 외신매체로 타전되면서 모두가 사방으로 사실확인에 나섰다.

다음날, 첸푸 외교부장은 언론매체의 고위 책임자를 대상으로 다시 한번 브리핑을 열었다. 회견 내용은 전날 국회에서 한 것과 동일하였으며, 계속해서 한국을 비난하고 단교의 책임을 모두 한국의 ‘배신’ 탓으로 돌렸다. 기자 회견에서 그는 뜻밖에도 이 글의 필자인 나를 두 차례나 거명하며 현장에 있는 유일한 한국문제 전문가로서 단교 사건에 대한 견해나 건의를 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같은 요청은 갑작스러운 것임은 몰론 외교 관례와 상식에도 맞지 않는 것이므로 필자는 그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후 외교부 아태사(亞太司, 아세아 태평양국) 직원 등 브리핑에 참석했던 많은 국회의원과 언론 매체 책임자들은 ‘첸푸에 이용당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왜냐하면 첸푸는 국민의 공분을 불러 일으키려 이틀에 걸쳐 대대적으로 한국을 비난하였고, 분명히 여론에 기대어 자신의 외교실정(失政)에 따른 잘못과 책임을 떠넘기려고 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단교 역사를 보더라도 외교부장이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여론의 갈채와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것은 보지 못하였다. 첸푸는 일부러 여론을 반한정서로 몰아감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모면하였기 때문에 여론의 사퇴 압력도 받지 않았다. 그의 외교부장 임기 내에 대만 최후의 두 큰 수교국가(다른 하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와 단교하였으나, ‘외교수재’라 불리던 첸푸는 사퇴하지 않고 계속해서 외교부장직을 이어갔다.

여기에는 그 개인의 감정적인 요소도 들어가 있다. 그의 미국 예일대학 박사학위 논문은 <한미 통상조약 체결 과정에서 청조의 역할>이었는데, 그의 한국관(韓國觀)에는 시종일관 대중화우월의식(大中華優越意識), 즉 종주국과 속국이라는 인식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로서는 당연히 ‘중화민국의 속국’으로부터 배반당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단교의 책임을 모두 한국에 돌림으로써 대만인들의 반한의식을 조장했으리라는 점도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올해로 대만과 한국이 단교한지 21년이 되었다. 이제 전국민의 반한기류를 누가 만들어내었는지 대만의 외교를 다시 검토해보아야 하겠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첸부는 여전히 ‘대만 외교의 대부’로서 대만의 외교에서 양안관계의 위계를 어떤 외교관계보다도 우선시 하여, 마잉주(馬英九)정부로 하여금 이를 ‘최고지침’으로 삼도록 하고, 나아가 중국과는 ‘외교적 휴전’ 상태로 만들었다. 따라서 대만의 외교부는 ‘대륙위원희’의 산하로 편입된 처럼 일개 ‘외교국(外交局)’으로 전락할 지경에 이르런 정도다.

첸푸는 아직 생존해있지만 그의 외교실정에 대한 평가는 이미 내려졌다. 미래의 대만인 쓰는 역사에 그는 이렇게 기록될 것이다. ‘첸푸, 대만외교를 고립시킨 역사적 죄인!’

(3) 대만vs.한국

1971년의 ‘닉슨 쇼크’를 틈타 일본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정부는 즉각 태도를 바꾸어 1972년에 서둘러 ‘중국 열차’에 올라타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이에 비해 한국은 꼬박 21년이 지나서야 중국과 수교를 하였다. 이는 미국(1979년에 중국과 수교)에 비해서도 13년이 늦은 것이다. 한국은 아시아의 대국 가운데 가장 먼저 대만과 수교하였으며, 또한 가장 마지막으로 단교하였다. 그 동안의 파란만장한 세월을 돌아보며 많은 한국 학자들은 감개무량하게 이야기 한다. ‘대만에게 우리도 할 만큼 한 셈이다’라고.

사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국민당 정권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 국민당이 대만으로 패퇴하였을 때는 이미 ‘몰락한 귀족’이나 다를 바 없었다. 자신의 몸을 추스르고 국제정세에 대응하면서(한국을 배운다거나 서독의 ‘할스타인 원칙(Hallstein Doctrine)’을 포기하는 등) 자립의 길을 모색하기 보다는 ‘국-공 불공대천(不共戴天)’만 고집함으로써 국제적 고립의 길로 들어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장(蔣)씨 왕조’의 마지막에 남은 것이 결국 확연히 차이 나는 국-공의 입지라는 것을 대만인들이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현재까지 대만을 승인하는 국가는 대만인들이 약소국이라고 소홀히 여겼던 21개국 뿐이다.

어디까지나 ‘이별은 이해의 시작’이다. 단교로 인해 대만은 한국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제 새롭게 한국을 바라보고, 다시금 상호 신뢰를 쌓으며, 한국에 호감을 가질 기회가 생겼다고도 볼 수 있다. 친구의 ‘겉 껍데기’는 잃어버렸지만, 더욱 실질적이고 서로를 이해하고 소중히 여기는 내실 있는 친구가 될 수 있고, 과거의 중(중화민국)-한 관계에서 대만-한국 관계가 되면서 더욱 실속 있는 교류가 가능해졌다.

지금 대만인들에게 여전히 대중화의식이 남아 있고 한국을 업신여기는 우월감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외성인(外省人)’과 비교해서 본성인(本省人)에게는 그런 전통적인 심적 부담이 없다. 많은 한국인들이 대만에 와서 본성인과 지내다 보면 본성인이 외성인보다 더 친절하고 쉽게 사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 본성인과 한국인의 최초의 교류는 일제시대에 있었다. 많은 조선의 군인들이 대만에서 대만군과 함께 훈련을 받고 동남아 전장으로 파병되었다. 그들은 함께 적들과 싸우면서 서로를 알게되고 형제와 같은 정을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이 ‘형제’가 결국 헤어짐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중국의 압력 하에서 중국에 대해 여전히 사대주의의 잔재가 남아있는 한국이 섣불리 대만과 정치적 교류를 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하다. 대만과 한국은 줄곧 유사한 발전 궤적을 보여 왔다. 모두 일본 식민 통치를 겪었고, 전후 정치,산업 발전의 속도 또한 비슷하였다. 피차 서로를 거울로 삼아 단점을 보완하고, 겸허하고 진지하게 서로의 장점을 배운다면 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대만과 한국은 1980년대 말부터 민주화가 시작되었고, 1990년대 말 ‘과거청산’ 작업을 완수하였다. 또 2000년 전후로 모두 정권 교체가 이루어져 서양 민주주의 제도가 실현됨으로써 전국민이 자유、민주、인권이 보장되는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양국은 똑같이 유교문화권 국가로서 2차대전후 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한 유일한 성공 사례로 평가 받고 있다. 이러한 성취로 인류문명의 발전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

게다가 양국은 공통적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있다. 이러한 도덕적 정당성을 바탕으로 양국은 민주주의 발전이 뒤처진 국가에 대해 ‘인권외교’와 ’민주주의 문화의 수출’을 추진하기 위해 더욱 협력하여야 한다. 이는 양국이 민주주의의 과실을 따먹는 것에 대한 미룰 수 없는 책임이자 사명이다.

(4) 통일과 독립이 대립하는 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대만은 ‘정상국가’가 아니다. 따라서 ‘통상적인 기준’이나 ‘보편 가치’로 대만의 국가체제、대중매체、사법제도 등을 평가할 수는 없다. 대만의 모든 문제는 국가정체성(National Identity)의 혼동과 혼란에서 기인한다. 대만은 지금도 ‘중화민국’을 국명으로 삼고 있으나 많은 이들이 ‘대만공화국’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어떤 이들은 ‘중화인민공화국’과 동일시하고 있다. (대만에서는 이들을 ‘좌통(左統): 좌파인 공산당으로 통일’이라 부른다. 극소수이며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는다.)

국가 정체성에 대한 불일치, 통일이냐 독립이냐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은 모두 ‘고향결정론’에서 기인한다. 즉, 자신의 고향에 대한 정체성에 따라 통일파와 독립파가 결정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재한 화교의 정체성은 분명 고향인 산동성(山東省)이지 대만일 리가 없다.)

소수의 ‘외래정권’인 국민당은 어떻게 대만에서 장기집권(1945~2000) 할 수 있었는가? 55년의 통치기간 동안 국민당이 의지했던 것은 첫째, 일본인이 남긴 자산을 당의 자산으로 흡수하고, 지방에서 대만 정치인을 매수하여 저변을 공고히 한 다음 매 선거에서 매표와 조작으로 정권을 유지하였다.(민주화가 실현되고서야 이러한 행위가 사라졌다.) 둘째, 당, 정,군(공무원과 군인은 대부분 국민당원임) 및 교육, 사법, 언론, 정보기관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와 장장 38년(1949~1987)에 달하는 계엄령으로 대만 사회 각 계층을 통제하였다. 이러한 고압적인 독재 하에서 국민당과 대만인들은 지극히 불공정한 상황에서 각축을 벌였다.

현재도 언론의 80% 이상(외성인에 의한 경영)과 교육계, 법조계의 대다수가 국민당원이다. 따라서 외성인이 주도하는 언론 보도는 자연히 대중화의식에 입각하여 중국 통일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경향이 있다. 동시에 이들의 한국관도 당연히 종주국으로서의 우월의식이다.

2011년 9월 정상기(丁相基) 주 타이페이 한국 대표부 대표가 취임한 이후 대만 언론이 선동하는 반한감정에 무척 곤혹스러워 하며 필자에게 자문을 구한 적이 있다. 어찌하여 대만 언론에서는 반일(反日)도(대만인들은 대부분 일본에 친근함을 느끼고 있으며 반일은 통하지 않는다.) 반미(反美)도 하지 않으면서 더군다나 현재는 반중(反中)도 하지 않으면서 유독 한국에 대해서만 반한(反韓)을 외치는가? 이에 대해 필자는 주 타이베이 한국대표부에서 대만 언론의 생태에 관하여 세 차례 강연을 한 바 있다. 대만인들이 국민당 치하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대중화의식을 가진 반한 인구가 약 70%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언론 종사자들은 잘 알고 있다. 대만에서 반한이 통하기 때문에 언론에서 이를 계속 이용하고 있으며, 필자도 마찬가지로 피해자가 되었다.

2. 대만인들의 한국관

(1) 대만의 인구구성


대만인들의 한국관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대만의 인구구성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대만은 본성인과 객가인(客家人)이 인구의 85%, 1949년 국민당 정부와 함께 대만에 들어온 외성인이 13%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세 부류보다 훨씬 이전부터 대만에 거주하던 원주민(14개부족)이 차지하는 비율은 2%에 불과하다.

1945년부터 2000년까지 대만인들은 국민당 독재정권의 일률적인 반공교육과 중화민국이 유일한 합법정부를 대표한다는 사상교육을 받았다. 심지어 지도에는 이미 오래 전에 독립한 외몽고가 포함되어 있을 정도다. 소수의 외성인이 쥐락펴락하는 교육체제 아래서 대만인들의 한국관에도 중화민국과 마찬가지로 허구와 환상이 존재한다.

국민당의 의식 속에서 ‘중한관계’는 ‘중화민국’과 ‘대한민국’의 관계를 가리키며, 서로를 ‘형제의 나라’로 칭하는 양국 간에 ‘형님’은 당연히 대만이고 ‘아우’는 한국이다. 이렇게 형성된 한국관에는 커다란 오류와 허위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2)노년, 중년, 청년 3대의 한국관

대만인들의 한국과에는 ‘하한(哈韓)’과 ‘반한(反韓)’의 양극화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哈’은 영어의 Hot에서 온 것으로 발음이 대만어의 ‘哈’과 유사하다. 따라서 ‘哈韓’은 ‘한국열기’ 또는 ‘한국사랑’을 나타낸다. 세대 구분에 따라 대체적으로 다음의 3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① 국민당세대(60세 이상): 상해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로 대다수가 대중화의 우월의식으로 한국을 오랜 ‘아우’로 대한다. 절대다수가 외성인이며 본성인도 조금 포함된다. 이들 부류의 한국관은 우월의식으로 충만하지만 반드시 ‘반한’인 것은 아니다.

② 단교세대(40~50세): 단교 전 양국간의 갈등을 직접 목격한 세대로 대부분 한국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국민당 집권 하에 교육을 받은 전후 베이비붐 세대다. 이들의 반한정서가 가장 강한데 심지어 비이성적으로 ‘한국(인)은 무조건 반대’ 라고 할 정도다.

③ 하한세대(10세~30세): 한국드라마와 K-pop 등 유행문화를 좇으며 대체적으로 한국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들 하한세대의 한국관도 완전한 것은 아니어서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 흥미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연구하지는 않는다. 또한 유행 문화에 흥미가 얼마나 지속될 지도 개인마다 다르다. 재미있는 것은 많은 하한세대의 부모는 반한족이라는 사실이다. 가정에서 부모 자식간에 일치된 한국관이 없고, 심지어 한국 관련 주제에 대해 이야기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어떻게 이 세대에게 효과적으로 ‘한국 바로 알기 교육’을 제공할 것인가는 양국의 학계, 문화계, 외교계가 깊이 연구해야 할 문제다.

(3) 대만의 트라우마

전후 줄곧 경쟁관계에 있던 양국은 1980년대 초 어깨를 나란히 하였으나, 2000년대 들어 우열이 분명해졌다. 문화산업에서 뒤처진 것 외에 2004년을 기점으로 대만은 경제 분야에서도 밀려 1인당GDP가 한국에 역전 당하였다. 특히 하이테크 분야에서 과거의 경쟁자(수평분업) 관계가 수직분업의 양상으로 바뀌었다. 즉, 한국은 자체 브랜드를 육성한 반면 대만은 주문자 생산방식(OEM) 위주여서 이렇게 다른 산업구조와 발전모델로 인하여 자연히 경제 격차가 점차 커지고있다. 오늘날 한국에 대한 대만의 위상은 대만에 대한 베트남의 위상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문화와 경제 분야에서 잇따라 대만인들이 좌절감을 느끼는 가운데 2010년 11월 17일에 터진 광저우 아시안게임 태권도 사태로 촉발된 반한기류는 유사이래 가장 거센 것이었다. 대만 언론에서는 사건 발발 후 며칠 동안 사건 보도에 지면을 대폭 할애하였다. 사실상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들 보도가 이를 보고 듣는 대중의 반한정서를 조장하기 위한 자작극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무위원 청즈랑(曾志朗), 위생서장(衛生署長) 양즈량(楊志良)등 일부 정부 관원들도 대중의 환심을 얻기 위해 언론에 영합하여 반한의 언행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포퓰리즘적인 작태는 마잉주(馬英九) 총통마저 이를 거들면서 더욱 심해졌다. 이로부터 1개월 후 ‘삼성 LED 자진 신고자 감면(리니언시) 사건’ 이 터지자 스옌샹(施顏祥) 경제부장, 궈타이밍(郭台銘) 홍하이(鴻海)그룹 회장도 ‘삼성이 상도를 어겼다’고 비난하며 반한정서를 자극하였다. 이렇게 해야 미디어에 노출될 기회가 생긴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강렬한 반한정서가 나타난 것일까? 양국은 수십년간 발전 정도가 비슷한 수준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 우열을 비교하는 심리가 있다. 여기에 대만 미디어 생태의 특수성(대부분이 외성인에 의해 경영됨)으로 대체로 우월의식을 가지고 한국을 바라봄으로써 한국에 대한 오해와 반감이 날로 커졌다. 게다가 중국의 네티즌들이 허위 사실을 유포한 것을 무책임하게 인용 보도하여 반한정서를 조장함으로써 그들의 우월의식을 만족시킨 것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대만 언론에서 중국 네티즌들과 함께 퍼뜨린 허위 사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한국이 한자를 발명했다.’, ‘쑨원(孫文)과 공자가 한국인이다.’, ‘단오절은 한국의 것이다.’, ‘중국의 4대 발명품이 한국에서 비롯되었다.’ ‘석가모니는 한국인이다.’, ‘이태백(李白)이 한국인이다.’, ‘농구선수 린수하오(林書豪)가 한국혈통이다.’ 등등. 나중에 조작된 것임이 밝혀졌지만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속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진짜로 믿는 경우도 많다. 터무니 없는 이런 허위 사실이 오히려 끊임없이 반한정서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눈에 대만의 반한 현상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대만인들의 트라우마다. 많은 대만인들의 뇌리에는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생각이 남아 있으며, 자신보다 한 단계 아래에 있던 한국의 비약적인 경제 발전에 대해 질투를 느끼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또 대만은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장기간의 외교적 고립으로 피해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최근 한류가 전세계를 풍미하고 있고, 한국경제도 크게 발전하는 상황에서 대만은 이전에 대단할 것 없던 나라에 추월 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고 이 때문에 반한정서가 생겨났다.

이 같은 반한 기류 속에서 대만정부 역시 이를 조장하고 있다. 바로 국민의 선거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이다. 혹시라도 ‘반중국(反中國)’분위기가 형성되어 집권 국민당의 선거 판세에 불리한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총구를 외부로 돌려 외부의 적을 이용해 내부의 단결을 꾀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외부의 적으로 삼을 만한 나라 가운데 중국은 너무 강하고, 일본은 대만인들이 좋아하는 나라기 때문에 한국이 유일하게 이용 가능한 공격 목표가 된 것이다.

이러한 반한기류를 보면 대만 언론의 행태는 매우 비이성적이다. 그리고 그들의 작태는 단지 감정을 분출하기 위한 것으로만 여겨진다. 더욱이 이전의 뒤엉킨 애증 관계 때문에 대만인들은 맹목적으로 언론의 편파적인 보도만 믿고 한국인에 대해 더 큰 오해를 낳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 많은 허위 사실들이 중국의 네티즌들에 의해 조작되어 대만으로 유입되었다. 그리고 대만 언론에서는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보도하였는데, 이 같은 행위는 한국의 언론들로부터 프로답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 중 <조선일보>의 이광회(李光會) 기자는 칼럼을 통해 대만을 성토하였다. 대만의 ‘국제고아’ 신세, 국가 정체성 결여로 대만인들은 모순적인 현실 속에서 스스로의 위상을 명확하게 정립할 수 없었다. 어떻게 대만 본연의 한국관을 수립하고 국민당이 중국으로부터 끌고 온 한국관을 포기할 것인가는 대만이 하루 빨리 풀어야 할 절박한 문제인 것 같다.

3. 문화외교를 통한 한국 바로 알기 – ‘知韓’

(1) 반한의 뿌리에서 막기


2013년 7월 6일, 주 타이베이 한국대표부의 후원으로 <지한문화협회(知韓文化協會)>에서는 ‘대만-한국 언론 고위층과 신방과 학자 좌담회’를 개최하였다. 주요 언론의 부편집장 이상 고위층과 중견 학자들이 좌담회에 참가하거나 정상기 대사와 만찬회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전례 없는 최초의 시도였다. 이번 좌담회는 기간도 반나절에 불과하고 좌담해 내용도 보도되지 않았지만 효과는 이미 나타났다.

지난 반년 동안 과장과 부추김으로 가득하던 반한 보도는 거의 사라졌다. 언론 고위층에 대한 ‘공작’함으로써 그 들이 더욱 신중하게 뉴스를 다루게 된 것이 첫 번째 효과였다. 두 번째 효과는 한국 외교관들이 대만 언론에서 조장한 반한 기류에 매우 신경을 쓰고 있으며, 뉴스를 다룰 때 좀 더 신중을 기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을 언론의 고위층과 신방과 학자들이 알았다는 점이다.

자본 규모가 영세하기 때문에 대만의 언론 매체들은 대부분 자금력이 부족하다. 따라서 저예산으로 제작할 수밖에 없고, 뉴스의 취재와 편집도 마찬가지다. 엄밀히 말해서 대만 언론이 보도하는 뉴스는 말 그대로 뉴스라기 보다는 오락성과 광고성이 가미된 형태에 가깝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종종 대만의 매체를 인포테인먼트(infor-tainment) 라고 비꼬아 말한다. 따라서 선정적인 뉴스나 가공되고 연출된 뉴스가 일상적이게 되었다.

이처럼 뉴스를 보고 듣는 대중들의 매체에 대한 신뢰도가 매우 낮다. A&R Edelman의 보고서(2006.10.24)에 따르면, 대만인들의 매체에 대한 신뢰도는 고작 1%로 아시아에서 최하위를 기록하였다. 대만의 언론들은 자유를 누릴 생각만 하지 책임, 특히나 사회적 책임을 지려고는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무정부주의적이고 방임주의적인 저널리즘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정치적 입장과 이데올로기에 따라 구분해보면 신문의 80%(발행부수), TV의 95%(종사인원)가 친중 성향을 띄고 있는데 이른바 통일파 언론다. 많은 언론들이 이미 베이징의 앵무새나 다름없고, 심지어 <인민일보>보다 더 <인민일보>스럽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경제적으로 그들의 시장과 명맥은 반드시 대만을 근거로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대만의 매체들이 대체로 자금력이 부족한 상황으로 볼 때, 작은 이익을 유인책으로 하여 그들을 먹여 살린다면 금세 길들여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으로 반한을 뿌리 뽑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2) ‘한국 알기知韓’는 대만에서부터

대부분의 한국인은 한류(한류, Korean Wave)라는 말이 사실 대만 신문의 영화면에 처음 등장했다가 대량으로 인용되면서 한자문화권 국가로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1994년 대만의 케이블TV 시장이 자유화되면서 3개였던 채널이 60여개로(현재는 140여 개) 급증하였고, 프로그램에 대한 대량 수요로 한국 드라마가 대만에 상륙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시문에서 ‘한류(韓流)’ 라는 표현으로 한국의 대중문화를 표현하였는데 중국어의 발음이 같은 ‘한류(寒流, 즉 한국어의 한파(寒波))’에서 따 온 것이다. 대만 북부의 한파가 몰아치면 매우 춥고 습해서(대만은 실내에 난방 설비가 없다.) 북부 지방 사람들은 한파가 몰아치는 날을 싫어한다. 그래서 한류라는 말은 원래 폄하하는 의미였으나, 후에 각국에서 유행어가 되면서 나쁜 뜻은 사라져 버렸다.

구양근(具良根) 전 주 타이베이 대표는 2011년 8월 인터뷰에서 대만이 2010년 들여온 한국 드라마는 총 162부라며 한류의 발원지는 분명 대만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 드라마에서 K-pop까지 첫 번째 수출국은 대만으로 중화권 시장에서의 수용도를 가늠해 본 뒤 기타 아시아 국가로 전해진다고 밝혔다. 이렇게 보면 대만은 한류라는 말을 만들어 냈을 뿐만 아니라 최대의 조력자인 셈이다.

한류가 대만에서 확산되기 시작한 만큼 ‘한국 알기知韓’ 사업도 대만이 앞장설 수 있다. 필자가 최근 추진하고 있는 ‘대만본위의 한국관’ 수립하기와 마찬가지로 중화권에서 ‘한국 알기’ 사업도 발전의 여지가 무한하다.

2012년 7월 13일 필자는 서울에서 있었던 만찬회에서 다음과 같이 축사를 하였다. 한국문제 연구에 종사한지 어언 40년인데 그 동안 한국의 성장과 발전 과정을 직접 보았다. 한국은 전후 각 단계에서 20년마다 ‘경제의 기적’과 ‘정치의 기적’을 일구어내었는데, 이제 한류의 기세를 빌려 ‘문화의 기적’을 이루어가고 있다.

한국처럼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30년 만에 전쟁의 폐허와 빈곤을 딛고 일어서서, 의식주를 해결하고, 교육을 보급하고, 20년마다 기적을 이루어내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지난 10년간 한류의 왕성한 발전이 한국인의 자존감과 자신감을 높여 준 것도 극히 드문 일이다. 물론 이것은 경제성장과 정치민주화 덕분이며, 신라문화와 백제문화가 융합하여 찬란하고 참신한 문화를 만들어 낸 덕택이다.

이제 필자는 또 한 번의 ‘지한(知韓)의 기적’ 이 일어나길 기대하며 이를 위해서는 지금부터 기획하고 설계하여 추진해나가야 할 것이다.

(3) ‘한국 알기知韓’의 구현

한류 문화상품이 모두 중화권에서 유일하게 자유민주국가인 대만을 해외시장의 시금석으로 삼고 있는 가운데, 이 역시도 1992년 단교 이후에 전화위복이 된 경우로 양국민은 이별 후에야 서로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대만인들의 심리 변화를 살펴보면 상당히 미묘하면서도 재미있다. 처음 10년은 한국에 대한 응어리는 단교의 그늘 속에서 마음 속에서 완전히 지울 수가 없었다. 반면 그 다음 10년은 한류와 월드컵의 열기 속에서 대만 신세대들의 한국의 대한 인식은 완전히 바뀌었다. 한류 시대에 쌍방관계는 국민 감정이 완전히 바뀐 상황에서 대만-한국 관계를 새롭게 검토하고 정립하는 것은 쌍방 정책결정자와 지식인들이 피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중화권의 ‘하한’과 ‘반한’이라는 양극화에 직면하여 필자는 ‘하한’과 ‘반한’을 막론하고 ‘한국 알기’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을 제대로 알아야 한국인들과 어떻게 상호작용 할 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을 알아야 새로운 시각으로 새로운 한국을 바라볼 수 있다. 구체적인 실현 방법은 다음의 건의를 참고해 주기 바란다.

① 각국에 한국 국가이미지 CF를 방송하고, 각국의 유명인사(예: 빌 게이츠가 대만 IT산업에 CF 출연)를 광고에 출연시켜 ‘새로운 시각, 새로운 한국’을 호소한다.

② 수교 후 20년 동안의 변화를 따라 한국인들은 차츰 ‘차이나 로맨스’에서 깨어나고 있다. 한국의 대만에 대한 대우도 과거의 ‘발판 역할’에서 ‘한-중 관계’의 ‘지렛대 역할’로 바뀌었다.

③ 대만과 한국이 서로에게 각각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무역국이 되었으므로 각각 주재대표를 격상시켜 국교를 맺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한다.

④ 문화외교를 추진하면서 현지의 민족적, 문화적 자존감을 존중한다. 현지 문화와 어떻게 결합하여 win-win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⑤ 광동어, 대만어, 상해어 같은 다양한 방언에 능통한 외교인재를 육성한다. (중국 사무에 밝은 박병석(朴炳錫) 국회부의장이 이러한 견해를 피력함.) 예를 들어 정상기 대사는 타아베이에 국경일 파티에서 대만어로 치사를 함으로써 내외빈들의 큰 박수갈채와 호감을 얻었다.


이상의 보잘것없는 견해에 많은 지도편달 부탁 드린다.


(2013.12.28 한국외국어대학교 대만연구센터 주최 <대만-한국 학자 전망 간담회: 중국대륙의 신국면과 대만-한국 관계>에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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台灣反韓情結的根源與文化外交觀點之對策

一、台灣反韓情結的根源

(一)斷交背景


從1980年代以來,韓國政府加速推動延續1973年朴正熙的「六二三宣言」之後而來的「北方政策」,傾全力要與我們的「敵人」(中國)交朋友,臺灣人也只能在無可奈何之中承受這個遲早要面對的事實。

台韓關係在這段漫長的變化過程中,無可否認的,臺灣本身因「國家認同」的問題導致無法面對現實而調整僵硬的外交政策,必須承擔最大的責任。臺灣不能因為自已不肯放棄堅持「一個中國」的政策,導致朋友一個接一個棄我們而去,就遷怒朋友「不講信義」、「不信守承諾」……。任何國家的外交絕對是以自己國家利益的追求為最高目標,當外國的國家利益與臺灣的國家利益抵觸時,他們選擇維護自己的利益是極其自然的事,換成臺灣也一定採取相同的作法。

不過,由於台韓關係的變化是在1980年代臺灣社會已經開始多元化變貌的時候,資訊的流通也開始頻繁,民智也已然成熟之後,在一次次事件的衝擊下,儘管臺灣人知道是我們自己的外交政策必須負更大的責任,但是他們比較不能接受的是,台韓這兩個曾經是亞洲最反共的患難兄弟,為什麼也會走上分手之路?因此臺灣人眼看著韓國一再表明要棄他而去,情緒上的反彈自然會比較強烈。

這中間,最大的衝擊性事件是發生在1983年5月5日的「中共民航機劫機事件」。臺灣媒體當時稱之為「六義士奪機投奔自由事件」。

這個事件對韓中關係的進展有絕對積極的意義,但對韓台關係而言,卻是令人慘不忍睹的負面效應。這個前後拖了一年三個月的事件,對韓台關係唯一的積極意義,就是透過一年三個月的機會教育,讓臺灣人徹底了解韓國的政策;不過,從此以後台韓關係就順勢一落千丈了。

「六義士案」期間,臺灣民眾從一而再、再而三的新聞報導中,看到韓國政府「欺負」我們的「反共義士」,於是便引發了情緒化的激情與衝動,一股強烈的「反韓情緒」便從此被揭揚起來了。當然,從韓國的角度來看,這實在是很冤枉的事,韓國不過是在履行國際法的義務,而將六名劫機犯依法處理。但是韓國方面顯然忽略了一點,那就是臺灣根本從未有過「國際法上的地位」,加上當時反共的意識形態的羈絆,臺灣人無法理解國際法上的義務竟然可以高過於我們之間的傳統友誼,可以說反韓情緒因此而生。

在先天上,中國人(不論海峽兩岸)原本就不太看得起韓國人(甚或朝鮮人),中國人基於他的「大中華意識」,對這個曾經是它的藩屬的半島上的人民,原來就有著先天上的優越感。在國民黨的教育下,許多臺灣人甚至直覺地認為,當年南京國民黨政府對韓國在上海臨時政府的支持,絕對有功而且有恩于韓國人;加上戰後蔣介石對韓國獨立的支持以及當年韓國駐華大使金信與蔣介石之間的「義父子」之間的關係,中華民國與韓國之間的關係是從「藩屬與宗主國的關係」到「父子關係」,到戰後才又成為「兄弟關係」。如今,做為「弟弟」的韓國,竟然反過來要欺負「哥哥」,如此先天的優越感再上後天的受害意識,互相衝擊之下,反韓情緒自然愈來愈高漲了。

(二)「斷交」是反韓根源

1992年8月19日下午,臺灣的立法院(國會)外交委員會全體委員,突然接到外交部通知,外交部長錢復將親自替他們舉行一場簡報說明會,有重大事情要宣佈。這個異乎尋常的舉動,引起了國會與媒體敏感神經的啟動。果然是很重大的事件,錢復在簡報會中宣佈,南韓已通報我方,將在八月二十四日與北京建立外交關係;盧泰愚政府表示將同時和臺灣斷交。錢復在說明會中痛罵,「被韓國人欺騙,韓國忘恩負義、不講信義」等。這個晴天霹靂的斷交消息由臺北率先宣佈,確實與過去的斷交經驗大不相同。斷交消息於是由臺北傳到漢城的外國新聞媒體,大家開始四處奔忙查證。

隔天,錢復部長又舉行一場簡報會,對象改為所有新聞媒體的高層主管。簡報內容與前一天對國會議員的完全一樣,繼續痛罵韓國,把斷交的責任全都歸咎韓方的「背信忘義」。倒是,錢復部長在會中兩度點名本文作者朱立熙,要求他以在場的唯一「韓國問題專家」身分,對斷交事件發表看法或提供「建議」給外交部。這是個很唐突的要求,而且也不符合外交慣例與常理,筆者於是斷然拒絕了他的要求。

事後,許多曾經參加簡報會的國會議員與媒體主管,甚至包括外交部亞太司的官員,都強烈感覺「被錢復利用了」。因為錢復連續兩天以大動作痛罵韓國,意圖引起全民公憤,而且,顯然要透過民意與輿論的「背書」(endorsement),來替自己的外交失政「卸責」與「脫罪」。因為以過去臺灣的「斷交史」來看,從來沒有看過外交部長可以那樣理直氣壯,還得到民意的喝采與與論的全力支持。錢復故意把民氣移轉為「反韓情緒」,來規避自己的政治責任,因此他就沒有在輿論壓力下被要求辭職下臺。在外交部長任內斷了兩個臺灣最後的大國(另一個是南非),而且被譽為「外交才子」的錢復,當然就沒有下臺,繼續安坐他的部長職位。

這中間還有著他個人的感情因素在內。錢復在美國耶魯大學的博士論文,寫的是「清朝在美韓通商條約締結過程的角色」。他的韓國觀始終是帶著「大中華」的優越感,也就是「宗主國」與「藩屬」的關係。他當然無法忍受被「中華民國的藩屬」所背叛,所以他會把斷交責任全部推給韓國,以致於造成台灣全民的反韓意識,也就不難想見了。

2013年是台韓斷交二十一週年。此刻應該重新檢討台灣的外交,是誰造成全民的反韓風潮。諷刺的是,錢復還以「外交教父」之姿,把台灣的外交定位為「兩岸關係的位階高於外交關係」,讓馬英九政府奉為圭臬,進而與中國「外交休兵」,所以台灣的外交部應該併入「大陸委員會」傘下,成立「外交局」也就可以了。

錢復雖然還沒蓋棺,但是他的外交失政已經論定。未來由台灣人寫的歷史會這樣記錄:「錢復,台灣外交孤立的歷史罪人」!

(三)台灣vs. 韓國

相較於1971年「尼克森震撼」導致投機的日本田中角榮政權立即見風轉舵,在1972年搶搭「中國列車」與北京建立外交關係,南韓足足晚了21年才與中國建交;而且,也比美國(1979)晚了13年。韓國是亞洲的大國中,第一個與臺灣建交,也是最後一個與臺灣斷交的國家。回顧這段滄桑歲月,許多南韓學者感慨地說,「對臺灣,我們應該也算仁至義盡了。」

其實,這只能怪國民黨政權自己。它敗亡到臺灣之後,已經是形同「沒落的貴族」,自己不知道調整身段去面對國際形勢(例如學習韓國,放棄西德的「霍爾斯坦原則」),並尋求自立之道,卻仍死守「漢賊不兩立」的頑固教條,落得自己一步步走上國際孤立的絕境。當臺灣百姓都知道蔣氏王朝最後只會落得「賊立而漢不立」,但已時不我予,到現還在承認臺灣的,只剩下二十一個被臺灣人譏為「小朋友」的國家。

畢竟,「分手是瞭解的開始」,斷交雖然讓臺灣對韓國不滿,但也不失為一個讓臺灣重新認識韓國,重新建立互信,並重新對韓國建立好感的機會,儘管失去了一個形式上的朋友,卻換來更實質、更相知相惜的朋友,從過去的「中韓關係」轉變為「台韓關係」,讓雙方能夠更務實地交流。

不可否認的,今天在臺灣的中國人仍有從中國帶過來的大中華意識,對韓國有著一股「看不起的優越感」。但相較於「外省人」,本省人就沒有那樣的傳統包袱。許多韓國人來臺灣,與本省人交往之後都會發現,本省人比外省人更親切,更容易交往。

事實上,本省人與韓國人的初次交往,是在日據時代,許多朝鮮軍人被派到臺灣移地訓練時,與臺灣軍人一起受訓之後,被派到東南亞戰場並肩作戰,雙方才開始認識而建立了兄弟般的情感。

儘管台韓這樣的兄弟,最後不免走上分手之路,但我們也不能否認,在中國的壓力之下,韓國對中國仍有著「事大主義」的情結,不敢也不能與臺灣有政治上的交流。臺灣和韓國的發展軌跡一直都很相似,同為被日本殖民過,戰後產業與政治發展的步調也相似,若彼此能夠互為借鏡,互相截長補短,還有能夠以謙虛誠懇地學習對方的長處,台韓雙方必然都會有更大的成就。

而且,台韓在1988年開始民主化,1990年代末期完成「過去清算」,2000年前後都實現政黨輪替,落實百分之百的西方民主主義制度,使人民能夠享受自由、民主、保障人權的生活,台韓兩國是二次世界大戰之後,亞洲僅有的成功典範,而且同樣是「儒家文化圈」的國家。這種成就,是我們對人類文明的偉大貢獻。

再加上,我們都共同有過為民主受難的經驗,基於這樣的「道德正當性」,我們兩國更應該攜手合作,對民主發展的「後進國家」共同來推動「人權外交」與「出口民主文化」。這是台韓兩國人民在享受民主果實之後,責無旁貸的責任與使命。

(四)統獨對立的台灣

儘管如此,今天的台灣並不是個「正常國家」,所以世人無法用「正常標準」或「普世價值」來看待它的國家體制、大眾媒體、司法制度等。台灣所有問題都源自於「國家正體性」(National Identity)的錯亂與混淆。雖然台灣現在仍以「中華民國」為國名,但是有許多人的認同是「台灣共和國」,也有一些人認同「中華人民共和國」(在台灣我們稱這些人為「左統」:與左派的共產黨統一,他們在台灣是極端少數,而且被認為是精神異常的人)。

國家認同的歧異,以及「統一」、「獨立」的論爭不斷,問題的根源就在於「故鄉決定論」,對自己故鄉的認同(Identity),決定了他是統派或獨派(例如:韓國華僑的認同必然是自己的故鄉山東省,而絕不會是台灣)。

國民黨做為一個少數的「外來政權」,如何能夠在台灣長期執政(1945~2000)呢?在55年的統治期間,它靠的是:一、接收日本人留下的財產為「黨產」,在地方收買台灣政客,以鞏固基層,並在每次選舉時以買票、作票的手法,以鞏固政權(直到民主化前才節制這種濫行);二、全面控制黨、政、軍(公務員與軍人幾乎都是國民黨員),以及教育、司法、媒體、情報機構等所有資源,並以長達38年(1949~1987)的戒嚴令來控制台灣社會各階層。如此高壓與獨裁統治之下,國民黨與台灣人其實是在極端不公平的立足點上競爭。

以致於到今天為止,八成以上的媒體(由外省人所經營),以及教育界、司法界的多數人員都是國民黨員。於是,在外省人所主導下的媒體報導傾向,自然就會以「大中華」意識來宣揚中國必須統一;同時,媒體的「韓國觀」當然也就是從中國帶過來的宗主國的優越感了。

所以,丁相基大使在2011年9月上任後,對台灣媒體所煽動的反韓意識感非常困惑,曾詢問過筆者:為何台灣的媒體「不反日」(因為台灣人大部份親日,「反日」在台灣沒有市場),也「不反美」,現在更「不反中」,卻獨獨「反韓」?我為此曾經去駐台北韓國代表部給他們上課三次,分析台灣媒體的生態結構。因為媒體工作者很清楚,台灣人在國民黨教育之下,帶著大中華意識而反韓的人口,大約佔了七成;由於「反韓」的新聞在台灣有市場,所以媒體樂此不疲,連我本人都成為受害人。

二、台灣人的韓國觀

(一)台灣的人口結構


談台灣人的韓國觀之前,必須對台灣島內的人口結構有基本的認識。在台灣,本省人與客家人佔了85%,1949年跟國民黨政府撤退來台的外省人只佔了13%,比這三大族群更早住在台灣的原住民(有14個族)則只佔了2%。

從1945年到2000年,台灣人接受國民黨獨裁政權的一元化反共教育,以及以「中華民國」代表唯一合法政府的思想教育,其地圖甚至還包含早就已經獨立的外蒙古在內。在少數外省人執政所控制的教育體制下,台灣人的「韓國觀」也跟中華民國一樣,存在著虛假的幻想。

在國民黨的認知裡,「中韓關係」指的是「中華民國」與「大韓民國」的關係,所以以「兄弟之邦」相稱的台灣與韓國,當然台灣是哥哥,韓國是小老弟。如此產生的台灣人的韓國觀,也就有極大的偏差與虛假了。

(二)老中青三代的韓國觀

由於台灣人的韓國觀呈現了「哈韓」(哈,是來自英文的Hot,發音與台語的「哈」接近,所以「哈韓」表示「韓國熱」或「熱愛韓國」的意思),以及「反韓」的兩極化現象。筆者以世代來區分的話,大體可以區隔為以下三類。

1, 「國民黨世代」(六十歲以上):因幫助過上海臨時政府,大都以大中國的優越感看待韓國這個「小老弟」。這其中絕大部分是外省人,但也包括本省人。這個族群的韓國觀充滿了優越感,但未必「反韓」。

2, 「斷交世代」(四十歲至六十歲之間):因為見證了斷交前兩國紛擾不斷,大都對韓國充滿反感。這些都是接受國民黨教育的戰後嬰兒潮(Baby Boomer)世代。這個族群的反韓意識最強,甚至到了非理性、「逢韓必反」的地步了。

3, 「哈韓世代」(十歲以上三十歲以下):因為著迷於韓劇與韓歌的流行文化,而普遍喜愛韓國。但是,這些哈韓族的「韓國觀」並不穩定,未必有興趣對韓國文化與歷史繼續深入探討。而且,對流行文化的喜好能夠持續多久,也因人而異。有趣的是,許多哈韓世代的父母親是反韓族,親子之間在家裡無法有一致的韓國觀,甚至不能談韓國相關的話題。因此,如何對這個族群提供有效的「知韓教育」,是值得台韓兩國學界、文化界,甚至外交界去深入探討的問題。

(三)台灣的Trauma Syndrome(創傷後症候群)
戰後一路競爭過來的台韓兩國,到1980年代初並駕齊驅。但是到了新世紀之後,優劣態勢已經很明顯。文化發展落後之外,2004年起臺灣也在經濟競賽中落敗,人均GDP被韓國超越。尤其,在高科技產業,由過去的「競爭者」(水平分業)關係,轉變為目前的「垂直分業」,也就是南韓在做「品牌」(Brand),而台灣卻在做代工(OEM),此不同的產業結構與發展型態,自然使台韓之間的經濟差距越來越大。今天,臺灣之於韓國,就如同越南之於臺灣。

在文化與經濟相繼讓台灣人產生挫折感之後,2010. 11. 17.發生的廣州亞運會跆拳道事件,引爆了有史以來最強烈的反韓風潮。臺灣媒體在事件發生過後的幾天內,持續以大幅的版面報導。事實上,明眼人從這些反韓報導看得出來,都是媒體自導自演的「自作劇」,為了製造閱聽大眾的反韓情緒。而讓人遺憾的是,臺灣一些政府官員,如政務委員曾志朗、衛生署長楊志良等,也為了討好觀眾而配合媒體演出反韓的言行,這種媚俗的民粹主義(Populism)行徑,在馬英九帶頭的作為下,尤其嚴重。以至於一個月後的「三星LED污點證人事件」爆發時,連經濟部長施顏祥、鴻海集團總裁郭台銘,都發表反韓的言論譴責「三星不守商道」,因為他們深知,只要反韓就能得到在媒體曝光的機會。

為什麼會出現這麼強烈的反韓情緒呢?多年來,由於台韓處於發展近似的競爭關係,導致種下了相互比較的優劣情結,加上臺灣媒體生態結構的特殊性(大多數為外省人所經營),它們普遍帶著中國的優越感在看待韓國,所以對韓國的誤解與反感日益增加,並且跟著中國大陸網友製造的假新聞在起舞,跟著做聳動而不負責任的報導,藉以鼓吹「反韓意識」以滿足他們的優越感。

二十一世紀前十年的中半以後,臺灣媒體跟著中國網民炮製的假新聞,包括:「韓國人發明漢字」、「孫中山、孔子都是韓國人」、「端午節是韓國人的」、「中國四大發明源於韓國」、「釋迦牟尼是韓國人」、「李白是韓國人」、「林書豪有韓國血統」等等。雖然事後都被證實是杜撰的假新聞,但是已經有無數人被欺騙,並且信以為真,如此看似無聊的假新聞,卻不斷掀起一波波的反韓情緒。但在韓國人眼中,不免覺得臺灣的反韓現象實在是莫名奇妙。

更嚴重的是臺灣人的創傷後症候群。由於許多臺灣人腦子裡還存有韓國曾經是中國的藩屬的思想,對於曾經低自己一等的韓國的快速發展,感到嫉妒及自尊心受創。也因為臺灣在國際社會中是不被承認為國家,長期的外交孤立產生了被害意識。近年因為「韓流」風靡全世界,經濟發展也大幅成長,臺灣無法接受被以前瞧不起的國家超越的事實,因而產生了反韓情緒。

臺灣政府在反韓風潮中,也扮演了推波助瀾的角色。這是為了轉移國民對選舉的注意力,並且擔心引發「反中國」的情緒而導致對執政的國民黨的選情不利,於是順勢把槍口一致對外,利用外部敵人來加強內部團結。而可以被拿來當作外敵的中國、韓國、日本,這幾個國家中,中國太強大,日本是臺灣人喜歡的國家,所以韓國就變成唯一可利用的箭靶。

綜觀這場反韓風潮,其實臺灣媒體的行為十分不理性,而且它們的所做所為只是為了「宣洩情緒」。加上以前的愛恨糾葛,使得臺灣人民總是盲目相信媒體片面的報導,而對韓國人產生更大的誤解,但實際上許多的假新聞都是中國網友在製造,再傳入臺灣。而臺灣媒體不經查證就直接報導,這樣的行為也讓韓國媒體撻伐臺灣媒體的不專業性,其中《朝鮮日報》的記者李光會,也寫過專題報導來指責臺灣。臺灣的「國際孤兒」處境,以及國家認同的闕如,使得臺灣人一直在矛盾的現實中無法明確定位自己。如何建構一個「臺灣本位的韓國觀」,並拋棄國民黨從中國帶過來的韓國觀,似乎更是臺灣人迫切需要去面對的問題。

三、以文化外交推動「知韓」

(一)從根源杜絕反韓


2013. 7. 6. 在駐台北韓國代表部的後援之下,「知韓文化協會」舉辦了一場「台韓媒體高層與傳播學者座談會」,邀請到所有主流媒體副總編輯以上的高層,以及重量級的學者來參加座談或與丁相基大使餐敘,可謂空前的創舉。這場座談會雖然只有半天,也沒有媒體對座談內容有所報導。但是,效果已經達到。

在過去半年間,誇張或聳動的反韓報導幾乎已經完全絕跡。從媒體高層來做「工作」,讓這些新聞的「守門員」能夠更謹慎地管控新聞,這是最初步的效果。其次,讓媒體高層與傳播學者知道:「韓國外交人員非常在意台灣媒體製造的反韓風潮」,會讓他們在處理新聞時更加謹慎。

由於資本規模零細,台灣的新聞媒體普遍都缺乏財力,因此只能以低成本製作,新聞的採編也一樣。嚴格來說,台灣媒體報導的新聞不能被稱之為「新聞」,而更像是「娛樂化」或「廣告化」的新聞。所以外國經常譏笑台灣媒體是「資訊娛樂業」( infor-tainment )。他們以「衝突性高」的動態畫面為首要選擇。所以煽情的新聞、加工或導演的新聞,已成為常態。

如此,導致閱聽大眾對媒體的信賴度極低。根據 A & R Edelman的報告(2006. 10. 24.),台灣人信賴媒體的程度只有1%,在亞太地區排名最後。台灣媒體只願享有自由,卻完全不負責任,尤其是媒體的「社會責任」。以致於被批判為「無政府、放任主義的Journalism」。

從政治立場與意識形態來區分:80%的報紙是「親中」(發行量)、95%的電視是「親中」(從業人員),也就是台灣所謂的「統派媒體」。許多媒體已經無異於北京的「傳聲筒」,甚至「比人民日報還人民日報」。但是,諷刺的是,在經濟利益上,他們的市場與命脈卻必須依靠台灣。

以台灣媒體普遍欠缺資金的情況看,只需以「小利」當誘因,來餵養台灣媒體,他們就能夠馬上被馴服。這也就是從根源杜絕反韓的最有效果的作法。

(二)「知韓」從台灣開始

大部分韓國人可能都不知道,「韓流」(Korean Wave)這個名詞,其實是發源自台灣報紙的影劇版,後來被大量引用,才傳遍「漢字文化圈」國家。1994年台灣開放有線電視(Cable TV)自由化,從原本三個頻道暴增到60多個(現在則是140多個),大量的節目需求,讓韓劇開始引進台灣。

當時報紙以「韓流」來形容韓國大眾文化,是取自中文發音相同的「寒流」(即韓文的「寒波」)。因為台灣北部寒波來襲時非常寒冷潮濕(台灣室內不用暖氣),北部人都不喜歡寒流天。所以,「韓流」一詞,原本是帶有貶抑的意思。後來在各國成為流行語之後,變成不帶負面意義的名詞了。

前任駐台代表具良根在2011年8月接受媒體訪問時表示,2010年台灣一共買進播放162部韓片。具良根代表都承認,台灣確實是韓流的發源地。所有韓國的大眾文化,從韓劇到K-Pop,都是以台灣為第一個出口國,測試華人圈的市場接受度,之後再傳到其他亞洲國家。台灣不只發明了「韓流」一詞,也是韓流的最大的「推手」。

所以,韓流既然是由台灣所帶動擴散,「知韓」的事業也可以從台灣來起頭。如同本人近年來所推動的、呼籲建立「台灣本位的韓國觀」一樣,知韓的工作在華人圈有無限的發展空間。

2012年7月13日,本人在首爾舉行的一次晚宴上致詞時表示,從事韓國問題研究迄今40年,見證了南韓發展與進步的歷程,在戰後不同階段、每二十年就創造一個奇蹟,包括「經濟奇蹟」與「政治奇蹟」,現在正借「韓流」蓬勃發展之勢,進一步在創造「文化奇蹟」。這三項奇蹟全部實現之後,南韓便能開創亞洲的新文明。

像韓國這樣積極進取,能在短短三十年內,從戰後的廢墟與貧窮之中站起來,讓人民溫飽富足,教育普及,並且每隔二十年就創造一次奇蹟的國家,在全世界確實沒有第二個。而且,過去十年藉由韓流的蓬勃發展,提升了韓國人的自尊與自信,確實也是世所僅見。當然,這要歸功於經濟富裕與政治民主,以及新羅文化與百濟文化彼此融合而形成豐富燦爛的嶄新文化。

本人期待,另一波「知韓奇蹟」的創造,應該從今天就要開始規劃、設計與推動了。

(三)「知韓」的落實

儘管韓流文化產品都是透過臺灣這個華人世界唯一的自由民主國度作為海外市場的試金石,不能否認的,這也是台韓在1992年斷交之後的「因禍得福」,兩國人民因為「分手之後才開始互相瞭解」。回顧二十年來臺灣人民的心理變化,可說相當微妙與有趣。前十年,臺灣人的韓國情結,在斷交的陰影下仍難以釋懷;後十年,則在韓流與世界盃足球賽的熱潮下,使新一代臺灣人完全改變對韓國的認知。在韓流時代雙方關係與人民感情完全改變的情勢下,重新檢討與定位台韓關係,也是雙方決策者與知識份子無法回避一個重要課題。

面對華人圈「哈韓」與「反韓」兩極化的現象,筆者認為不論是哈韓或是反韓,都要先「知韓」。知韓之後,才知道怎麼跟韓國人互動;知韓之後,才能夠「以新眼光來看待新韓國」。如何具體落實知韓,本人願提出以下建議供參考。

一、在各國推出「韓國國家形象CF」,請各國知名人士(例如:比爾蓋茲曾替台灣IT產業拍攝廣告)廣告代言,訴求「用新視角看待新韓國」。

二、全力在「華人圈」推動知韓活動。「韓流」既然是從台灣發源,「知韓」也可從台灣開始。

三、隨著建交二十年後的變化,韓國人漸漸從「中國夢」(China Romance)清醒,韓國對待台灣也應從過去的「跳板角色」,蛻變為韓中的「槓桿角色」。

四、台韓既然互為雙方的第五大與第六大貿易國,雙方應提升駐在對方的代表的層級,不能因沒有邦交而視其為「閒缺」,也不予以重視。

五、推動文化外交,必須尊重當地人的民族尊嚴與文化自尊,否則必定會與當事國發生摩擦。應當思考如何結合當地文化共創雙贏發展。

六、培養通曉多元方言的外交人才,諸如:上海話、廣東話、台灣話等(通曉中國事務的國會副議長朴炳錫即有此議)。例如,丁相基大使在台灣用台語致詞,就贏得全場賓客的喝采與好感。


以上淺見,敬請批評指教。

(2013. 12. 28. 發表於「台韓學者前瞻對話會議:中國大陸新局勢與台韓關係」,由韓國外國語大學「台灣研究中心」主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