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폭력에서 인권도시로:대만「美麗島사건」vs. 한국「광주항쟁」
 
 
국가폭력에서 인권도시로:대만「메이리다오(美麗島)사건」vs. 한국「광주항쟁」
발표자: 주립희(대만 까오슝시 인권위원회 위원)
2013. 5. 17.「2013 세계 인권도시 포럼」 광주 KDJ센터


2008년 11월에 필자는 대만 중부에 있는 창화현 시조우향(彰化縣溪洲鄕) 현지인 약 200여명의 농민들과 함께 「화려한 휴가」를 감상한 적이 있다. 그 다음, 광주MBC 제작, 「518기념재단」이 발행한 다큐멘터리「광주항쟁(Gwangju Uprising)」을 보여 주었다. 행사가 끝난 후, 열정적인 주인이자 시인인 우성(吳晟, 대만 문단에서의 지위는 한국의 고은 씨에 상당함)씨의 요청으로 머무르게 되어, 현지의 유지, 지식인들과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 가운데, 한 분이 현지 경찰서의 형사부장인 황성루(黃盛祿, 현재는 시조우향장을 맡고 있음. 전남의 함평군수에 해당)씨로, 그 분은 필자에게 이 다큐멘터리가 국립경찰대학교에 다닐 때(1977-81)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고 하였다. 당시, 경찰대학교에 「폭동진압훈련실무」수업이 있었는데, 바로 한국경찰이 학생 가두시위를 진압한 자료영상을 교재로 삼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 자료영상은 한국경찰청이 제공한 것으로, 한국에서 전、후임의 가장 잔혹한 두 군사 독재정권시대, 국가폭력으로 민주화운동을 진압하고 인권을 유린한 실재영상으로 대만 경찰대생의 훈련 교재로 삼은 것이다.

이 경찰의 이야기를 듣고, 필자는 경악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원래 대만과 한국의 독재정권 시대에, 뜻밖에도 이러한「반민주」, 「반인권」의 진압 수단이 모두 서로 학습하고 교류한 것이라니, 정말이지 얼마나 비열하고 수치스러운 일인가! 그래서 오늘 발표를 이 이야기로 시작하려고 한다.

시간을 3년 반 전으로 돌려 놓아, 2009년 12월 10일에 메이리다오 사건 3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다. 당시, 필자는 까오슝 시장 천쥐(陳菊)를 대신하여 「국가인권위원회」를 사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안경환 위원장, 당시의「518기념재단」윤광장 이사장 등 귀빈을 초청하여 까오슝에서 일련의 기념 행사에 참가하였다. 필자는 뤼시우리엔(呂秀蓮) 전 부총통이 진행을 맡은 「대만, 한국 인권대화」에서 통역을 맡았다.

뤼시우리엔 전 부총통은 그때 안경환 교수에게 가슴 아픈 비밀을 털어 놓았는데 본인이 통역을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인상이 깊다. 뤼시우리엔은 「메이리다오 사건」의 피해 당사자로, 그녀는 출옥 후에 비로소 국민당 장징궈(蔣經國)정권이 비열한 수단으로 그들을 함정에 빠뜨린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메이리다오 사건」은 미리 짜놓은「선진압, 후폭동」의 책략적인 흉계였던 것이다.

헌병으로 제대한 대만 청년이 그녀에게 알려 주었는데, 메이리다오 잡지사 부근의 건물 지하실에 200여 명이 넘는 사복경찰, 상고머리를 한 헌병들이 그 안에서 「근무 전 훈련」을 받고, 그 다음 여러 무리로 나뉘어서 군중 속으로 섞여 들어가서는 군중과 함께 구호를 외치고 시위를 하면서 헌병과 경찰들의 봉쇄선 앞까지 갔다고 한다.

이때, 사복 차림의 상고머리를 한 군중들이 큰 소리로 고함을 쳐서, 헌병과 경찰에 야단을 쳤고, 그 후 손에 든 각목 또는 철기로 헌병과 경찰에게 공격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공격을 당한 헌병, 경찰은 핑계를 삼아 반격의 공세를 취하고, 몽둥이와 총으로 공격, 군중에게 강력하게 진압을 전개하여 적지 않은 군중들이 피를 흘리는 부상을 당했다. 원래 평화시위를 진행했던 군중은 헌병과 경찰의 진압을 당한 후 분노하여, 더욱 격렬하게 대항을 하게 되었고, 잇달아 사방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돌멩이, 몽둥이 등을 찾아서 헌병과 경찰에 대항하였는데, 이른바「군중폭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이 짜놓은 함정을 알지 못했던 재야 인사들은 맹목적인 군중들을 이끌어 올가미에 걸리게 된 것이다. 「선진압, 후폭동」의 국가폭력은 메이리다오 사건 충돌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만인은 국민당의 이러한 비열한 수단을 모르고 있으며, 국민당「어용언론」에서는 오히려 재야인사가 민주를 쟁취하는 행동을 「폭도의 폭동」으로 보도하였다. 왜냐하면, 신문매체는 단지 헌병과 경찰이 많은 군중들로부터 난폭한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고 크게 보도할 뿐, 얼마의 군중들이 다쳤는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이것은 광주항쟁 당시의 매체와 거의 같다).

보수경향의 「연합보」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경찰 한 명이 병원의 침상에 누워서 위아래 이가 폭도의 쇠갈고리에 의해 뽑혔다고 했다. (이게 가능한가? 시위현장에서? 경찰이 얌전하게 입을 벌리고 쇠갈고리를 입에 넣어 이를 뽑게 했을까?) 사건이 일어난 후 유사한 보도는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민주 인사를 「폭도화」하기 위한 것으로 국민들의 공분을 일으켜, 독재통치 당국은 군법의 재판을 받도록 「합리화」하기 위하여 사건 주모자에게 반란죄를 씌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필자 생각에 광주항쟁을 잘 아는 여러분께서는「데자뷰」의 느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광주항쟁」과「메이리다오 사건」의 국가폭력 성격이 뜻밖에도 왜 이렇게 비슷한가? 메이리다오 사건은 1979년 12월 10일 세계 인권의 날에 발생하였고, 5개월 후에 518광주항쟁 사건이 발생하였다. 놀랍게도「선진압, 후폭동」이 아닌가? 함정 책략도 너무 흡사한 것이 아닌가? 전두환 등의 신군부 세력은 메이리다오 사건에서 뭔가를 얻은 것은 아닐까? 대만의 장씨 왕조 독재정권에게 폭동진압의 경험과 기술을 제공받은 것은 아닐까? 마치 한국 경찰이 폭동진압 영상을 대만에 제공하여 교재로 사용하게 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당연히 이렇게 합리적으로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양국 독재정권의 최고정보기구간에 반드시 밀접한 합작교류 관계가 있어서, 사건 발생의 시간과 진압의 형태가 이렇게도 유사한 것이라고 말이다. 이러한 추악한 교류 기록 사료가 양국 민주화 이후 진상을 밝혀 내는 과정에서 더욱 가치가 있는 연구 소재가 되길 바란다.

국가폭력으로 민주화운동을 진압하여 발생한 메이리다오 사건의 원인을 말하기 전에 당시의 시공간 및 환경에 대해 반드시 설명해야 할 것이 있다.

1978년 8월, 당시 까오슝현장을 맡고 있던 무당적(당시 계엄령하에서 정당 조직을 허가하지 않았음. 「무당적」은 일반적으로「당외」라고 하고, 「국민당 이외」의 재야인사를 의미한다)위덩파(余登發)와 그 아들 위뢰이옌(余瑞言)은「간첩우타이안(吳泰安)사건」에 연루되어 기소를 당하였다. 죄명은 「간첩 불고지죄」, 「간첩활동 선전죄」였고, 8년의 유기징역형을 받았다. 당시 사회에 강한 불만 및 당외 인사의 반발을 야기시켰는데, 당외 인사들은 정부가 위덩파 부자 체포기소의 목적이 전 대만의 당외 인사의 연계를 막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1978년 12월 16일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는 1979년 1월 1일부터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맺고, 대만 당국과는 단교를 한다고 선포했다. 장징궈정권은 미국이 포기하여 정권은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였다. 당외 민주운동 지도자인 황신지에(黃信介), 스밍더(施明德)등이 만든「메이리다오 잡지사」는 전 대만각지에 지사가 설립되었는데, 실제로는 이미「준정당」성격을 구비하고 있었다. 각지의 잡지사를 통해서 뜻이 같고 생각이 일치하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들여 조직의 세력을 확대, 장씨 왕조의 통치 권위에 도전하고 있었다.

1979년 1월 22일, 당외 진영은 시위로 위덩파 부자를 성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스밍더는 총책으로 시위의 전체 조직동원을 맡았고, 쉬신량(許信良), 황신지에(黃信介), 천쥐(陳菊), 흐어춘무(何春木), 장쥔헝(張俊宏)등을 포함한 주요 당외 인사들은 까오슝현 치아오토우향(高雄縣 橋頭鄕)에서 시위행사를 전개하여, 정부에 위덩파 부자를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위씨 부자는 비록 즉시 석방이 되었으나, 당시 성원 시위에 참여했던 전국에서 명망이 높던 타오위엔(桃園)현장 쉬신량(許信良)은 오히려 정부로부터 정직 처벌을 당했다. (이것 역시 YH사건 이후 국회의원에서 제명된 김영삼과 비슷하다).

이것은 국민당 정부가 대만에서 계엄을 실시한 지 30 년이래, 처음으로 발생한 반정부 시위운동으로, 대만의 민주화 운동사에서「치아오토우사건」으로 불리는 대만 민주발전의 중요한 이정표이다. 치아오토우사건은 당외 세력과 당시 정부가 정면으로 충돌한, 그 시대에 대만 민중에게 계엄령(시행기간 1949~1987)의 오랜 억압 아래에서, 대만인의 자주의식이 부상하고 민주의 씨앗 역시 남대만에서 싹이 트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치아오토우사건이 메이리다오 사건에서 맡은 역할은 마치 광주민주화 항쟁운동 1년 전에 부산과 마산에서 발생한「부마항쟁사건」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대만의 계엄시대에 반국민당의 재야인사는 정당을 조직할 수 없어, 겨우 잡지를 발행하여 그들의 정치이념을 퍼뜨릴 수 있었다. 50년대에 격주로 발행하는「자유중국」이 가장 주목을 받았고, 70년대 하반기까지는 월간 「대만정론」이 잠깐 발행되다 사라졌고, 그 후에는 월간「80년대」와 「미려도」잡지(한국의「말」지에 상당함)가 모두 진보파 지식인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1977년 말에 5대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있었는데, 「당외」인사가 현, 시장에 당선하여 4석을 차지했고, 21석의 성의원, 8석의 타이베이시의원, 146석 현시의원, 21석 향•진장에 당선되어, 전에 없던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선거 깃발을 걸고 승리를 거둔, 「당외」인사는 기운이 나서 점점 조직화가 되었다.

우선, 「당외」의원끼리 서로 연계하여, 단체행동으로 기세 만들 준비를 하였다. 정부는 원래 1978년 말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하려고 하였다. 황신지에는 그 해 9월 말에 「전대만 당외후보 선거응원 유세단」을 결성하여 각지를 순회하며 선거를 유세돕기로 하였다. 11월 24일 단체를 정식으로 설립하고, 12월 7일 국회의원 선거운동을 시작하였다. 마침 선거 분위기가 가열되고 있을 때, 12월 16일 미국 대통령 카터는 갑자기 1979년 1월부터 정식으로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 「공동방어조약」을 폐지한다고 선포하였다. 같은 날, 장징궈는 즉시 긴급조치를 발표하고, 모든 선거활동을 그날부터 모두 정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선거의 정지로, 「당외」정치참여 통로가 갑자기 막히게 되어, 방향을 바꾸어 길거리의 민중항쟁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1979년 2월 1일, 까오슝현 치아오토우향 위덩파 자택에서 1천여 명의 당외 유명인사를 모아 저녁집회를 거행하였다. 경비사령부(당시 한국의 보안사에 해당)는 1월 21일, 「간첩 우타이안(吳泰安)반란에 참여한 혐의」의 날조된 죄명으로 위덩파부자를 체포했다. 다음날 쉬신량, 장쥔헝, 스밍더 등 당외 핵심인사가 모두 치아오토우향에 모여, 계엄시대에 감히 보기 힘든 시위를 전개하였다. 결과는 대만성 주석 린양깡(林洋港)은 국민이 뽑은 타오위엔 현장 쉬신량을 「공무원징계위원회」에 보내 처벌하게 하였다. 4월에 위덩파는 8년 징역형, 그 아들 위뢰이옌은 3년 징역형을 판결 받았다. 한편, 감찰원은 쉬신량 탄핵을 통과시켰다. 6월에 공무원징계위원회는 정직2년의 처벌을 내렸다.

9월, 「당외」인사인 황신지에등은 「메이리다오」잡지사를 설립하였다. 연달아 3개월 뒤에 「메이리다오」잡지사는 전 대만 각 대도시에 따로 지사를 내고 지역마다 사무소를 두었다. 사실은 이미「준정당」의 지방 당부의 형태를 갖추었으나, 극우 단체(제주43의「서청」에 상당함)의 강력 대항으로 인해 메이리다오 잡지사의 일부 지사 또는 사무소가 부숴졌다. 황신지에의 거주지는 또 방화를 당해, 대립 정세가 갈수록 긴장되었다. 「메이리다오」잡지사는 1979년 12월 10일「세계인권의 날」에 까오슝에서「인권대회」를 거행하는 시위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일 인권기념일에 참가한 민중은 약 2만여 명에 달해, 원래는 정치견해을 전파하는 강연회였는데 마지막에는 경찰과 민중의 충돌로 변하였다. 행사를 주도한 민주인사가 오히려 반란범으로 군법의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메이리다오 사건이다. 국민당정권은 폭동진압 부대를 출동시키고, 진압차와 최루탄으로 전체를 소탕하였다. 1977년에 선거 부정행위로 야기된 「중리(中壢)사건」이 발발한 이래, 당외 민주투사와 장씨 왕조 정권 사이의 최대 충돌이었다.

그 해에 당외 인사들의 전국적인 연계는 당외 인사의 장씨 독재정권에 대한 민주 쟁취 투쟁의 가장 이정표적인 역할이었다. 독재정권의 공포감은 필연적인 것으로, 그의 첫 번째 철천지원수는 바로 재야인사의 저항하는 힘의 조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 국민 눈앞에 있는 세상은 여전히 이전과 같은 자유롭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해, 대립과 충돌의 기본 요소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12월 10일 저녁 6시 반에 스밍덕, 야오지아원(姚嘉文)등은 2, 3백 명의 군중을 이끌고 중산1로의 로터리에서 강연을 진행하였다. 주위는 오히려 헌병과 보안 경찰에 의해 겹겹이 둘러싸여, 포위선 밖은 인파들이 호기심을 갖고 인사들을 에워싸고 구경하였는데, 현장의 긴장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다수의 현장에 있었던 인사들의 구술에 근거하면, 당시 8시 10분쯤 하얀 연기가 나기 시작하더니, 현장은 곧 군중들이 놀라 허둥대는 소동이 생기고, 일부 흥분한 군중이 부근의 경찰서를 공격하자고 제의하였다. 당외 인사들은 중리사건이 재연될까 걱정하여, 군중들을 이끌고 원래 강연회 현장으로 돌아갔다.

2만여 명이 참가한 시위 과정 중에 군경과 민중은 적어도 4차례의 충돌이 발생하였다. 밤10시가 넘어, 폭동진압 부대는 강제해산 명령을 내렸고, 이미 폭동진압 인원은 군중 가운데로 뛰어들어 반대로 포위되어, 양쪽 모두 부상을 입고, 11시가 넘어 행사가 비로소 전부 끝났다.

세계인권의 날 강연 행사 후, 당외 진영의 주요인사는 거의 전부가 체포되어, 대만 민주화 운동이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그것으로 인해 수난을 당한 가족들과 변호사 위주로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 민주 진영의 세력이 지속되었다. 당시 계엄령 아래에서, 당외 정치인사는 모두 감옥에 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 정치 운동의 비극적 색채가 자못 농후하였다. 이것은 대만의 228사건 후에 규모가 가장 큰 사회 충돌로, 사건 발생 이후 사건을 주도한 중요 당외 인사는 체포와 재판을 받았으며, 심지어는「반란」이라는 사형죄로 기소되어, 마지막에는 국내외 각계와 미국의 압력하에 나중에 6년 형, 12년 형 내지는 무기징역 형을 판결받았다.

피해자의 구술에 근거하면, 사건 발생 때 참여한 군중들이 상상한 것보다 복잡하였다. 비록 명의상은 남부경비사령부에서 현장의 진압작전을 주관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각 정보 기구에서 각자 행동한 것이었다. 더욱이, 입장이 다른 피해자 모두가 강조하길, 당시 당외 인사는 조직적으로 연계하여 진행을 시작한 것으로, 정보기구 공작원의 침투 행동(이것은 뤼쉬우리엔 전 부총통이 말한 「가짜 폭도」가 먼저 공격한 것으로, 선진압, 후폭동의 원인이다)이 관민양쪽의 대립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메이리다오 사건이 발발한 후, 해외에 있는 대만 교민은 일치하여 장씨 정권에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해외의 당외 사무소가 많이 파괴되었으며, 사무소는 급하게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경찰이 주둔하여 지키며 공격을 예방하였다. 뉴욕과 해외 각지에 있는 대만인권단체는 정식으로「대만건국연합전선」을 세우고 선포하여, 독재정권 타도 추진에 힘을 집중하여 세력을 발전시켰다. 또한 수감된 민주투사를 구조하였다. 연합전선의 설립은 해외 대만교민의 추진으로 민주화의 욕구를 더욱 강화하여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지금까지 「메이리다오 사건」(혹은 까오슝 사건이라고 함)은 많은 진상이 여전히 다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리덩회이(李登輝) 총통이 소리 높여 외친 「신대만인」론, 민족 화해를 강조한 것과 동시에 이 시기는 민족대항 정치적 의미의「메이리다오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우울한 역사의 기억은 마침 대만 정치사회의 변천과 함께 빠르게 유실되어 가고 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 비극적인 기억이 재현되면 이미 화합된 민족 간에 상처를 준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대만사람의 이 공통적 역사경험에 대해서는 존중을 해야 한다. 우리가 더 바라는 것은 진심으로 역사를 대하고, 역사에 대한 진상의 탐색을 통해, 신세대 대만인이 이 정치사건에 대해 더욱 많이 이해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대만인이 비로소 손을 잡고 비극의 와중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며, 진정한 신대만인 세기를 맞이할 것이다.

메이리다오 사건의 후속 효과는 정부를 압박하여 집권방침을 바꾸도록 하였는데, 대만 본토인의 정치 참여가 점점 개방되었다. 계엄해제, 정당금지 개방, 미디어 개방 및 언론자유, 그리고 국회의원 보궐선거 전면 진행이 포함되는데, 메이리다오 사건은 참으로 대만 민주화 운동사상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여기까지 읽고, 한국 친구들은 당연히 메이리다오 사건과 광주민주화 항쟁의 본질, 뜻밖에도 서로가 비슷한 점을 이해할 것이다. 「선진압, 후폭동」의 수법이 같고, 「함정계략」의 비열한 것 역시 하나도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광주항쟁의 역사적 위치는 이미 명확하게 「광주518민주화운동」으로 정의되었다. 가해자 또한 1996년의 사법판결에서 중형을 선고 받았다. 「과거청산」의 작업이 일단락 되었다(비록 1980.5.21 사격개시 명령을 내린 원흉은 여전히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러나, 대만의 메이리다오 사건은 여전히 많은 진상이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정보기구의 잠복 공작원이 앞장서서 군중 폭동을 일으킨 책임 역시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그렇지만, 민주화운동의 피해자는 여전히 군중 폭동을 선동한 오명을 짊어지고 있다.

이것이 뤼시우리엔 전 부총통이 강력하게 주장한「메이리다오 재심」으로 민주항쟁 인사에게 역사적으로 공정과 정의를 돌려주어야 한다는 이유이다. 메이리다오 사건은 올해 34주년을 맞았으나, 사건과정과 진상은 이미 예전처럼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사건의 피해자와 변호사들, 해외에서「대만독립운동」을 고취하는 지사들까지 모두 2000년에 민진당이 집권한 후 대부분이 정부의 각료로 임명, 이러한 형식으로 그들이 보상을 받아, 대만인들이 느끼기에 다시 진상을 추궁하거나 그들의 명예를 돌려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인이 광주항쟁에 대해 끝까지 진상을 추궁해내는 것과 비교하면,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다년의 항쟁정신은 확실히 대만인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34년의 세월이 지나갔으니, 다시 사법조사를 재조사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메이리다오 사건은 폭정 저항, 민주쟁취와 인권보장의 인민투쟁을 위한 것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다. 까오슝시 역시 이 국가폭력진압 민주화 운동의 사건 때문에 국제 간에 대만의 유일한 「인권도시」로 인정된 것이다.

까오슝은 인권도시로, 1947년의 228사건이래 많은 비참한 투쟁과 열사의 희생등 인권운동이 발생하였다. 전해오는 인권과 민주화 투쟁이 뒤섞인 감동스런 이야기는 다음 세대에 인권진보의 범례로 학습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남겨졌다. 이렇게 쌓인 과정 중에 까오슝에 가져다 준것은 대만의 어느 도시보다 인권을 중요시하고, 인권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2008년, 까오슝시장 천쥐는 세계인권의 날에 본 시에 「인권위원회」를 설립하고(현재까지는 전대만에 유일하게 지방정부에 인권위원회가 설치되어 있다), 12월을 「까오슝 인권의 달」로 정했으며, 2009년에는 「인권도시」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까오슝 인권백서를 제정하였고, 지하철 메이리다오 역에 「인권학당」을 설립하였다. 인권이념을 사람들의 생활 중에 실현하는 것은 까오슝시의 인권에 대한 지식과 가치의 구체적 실천이라 하겠다.

2010년, 까오슝시는 인권운동을 보장하기 위해 추진한 것으로 시의회에서 「까오슝시 인권자치조례」를 제정하였다. 이외에, 시 공무원의 인권개념 및 소양을 강화하기 위해 인권법치 관념을 교육하고 있으며, 「까오슝시 및 각 기관 소속직원 인권교육 훈련 보급실시 계획」을 제정하여 시에서 시작한 인권관념이 확실하게 까오슝시의 모든 외진 곳까지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다.

지금까지 인권운동 추진으로 까오슝시에서는 여러 차례 인권관련 행사를 열었다. 예를 들면, 매년 9월에 동성애자 퍼레이드 개최, 까오슝시 인권안내 자원봉사자 훈련과정 개설, 인권문화 학교 전시 서비스, 까오슝 인권안내 자원봉사대 설립, 인권관련 도서 등 출판물 출판 및 편찬 등이다. 2011년부터는 인권학당이 진일보하여 「인권보도상」을 개설하여, 언론매체에 종사하는 이들이 인권이슈의 보도를 많이 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2012년 12월에는 「탈북자인권」을 보도한 영상작품이 수상을 하였다. 그러므로, 까오슝의 인권에 대한 관심은 이미 국경을 뛰어 넘은 이슈로까지 미치고 있다.

2012년, 시정부는 인권이슈에 초점을 맞추고 「2012인권도시 국제워크숍」을 개최, 미국의 인권조직 PDHRE 운영자 Robert Kesten가 초청되어 강연을 하였다. 까오슝시정부의 모든 소속 기관, 각급학교, 비영리조직 등 단체를 이끌고, 함께 인권 알기, 인권 체험을 하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권문화를 보급하기 위한 것이다. 까오슝시의 인권에 대한 중시로, 다행스럽게 연속으로 3년 광주에 초청되어 「세계인권도시포럼」에 참여할 수 있어서, 까오슝시는 영예롭게 느끼고 있다.

인권은 도시마다의 기본 가치이고, 정책 결정 도구이자 사회의 평화와 함께 번영하는 것이 최대 공약수라고 깊게 믿고 있다. 정부 역할의 진정한 의미는 인권가치의 실천에 있으며, 도시의 미래의 비전과 발전방향은 더욱 반드시 인권에 대한 진정한 의미, 공공안전 및 도시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이러한 민주주의와 인권가치는 반드시 모든 시민의 마음에 깊게 새겨져, 이번 성회에 참여하는 도시와 함께 공동으로 노력하길 기대한다. 함께 「인권도시」만드는 것을 목표로 함께 매진합시다.
필경, 어느 시대나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누릴 권리가 있다.

자유, 민주를 포함하여 평등하게 생존하고 발전할 기본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권사상과 그 작업의 추진은 마땅히 인도주의를 존중하는 법칙과 사회구성원 사이에 개인의 존엄과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중요성에 대한 생각에서부터 의식하기까지가 끊임없이 탐색되어야 한다. 이것은 인권에 대한 기본 개념으로, 호혜의 권리와 책임은 더욱이 공정한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계약이다. 그러므로, 존중, 합작, 공정과 정의 등 관념의 가르침은 바로 우리가 인권을 선도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일환이다.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의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