愛女彌陋的藝術世界
 
 
版主按:本文是南韓國師金容沃教授為金彌陋前衛藝術展而寫。金彌陋的「初始•駱駝•在荒漠」2013年新作全球首展,於2013/1/19~2013/3/3在高雄駁二藝術特區展出

愛女彌陋的藝術世界
                               
檮杌 金容沃(韓國哲學思想大師)

即使是自己女兒,身為父親的我並非一定瞭解她的精神世界。彌陋是我們家五口中的老么,我在美國讀哈佛大學時,她在波士頓地區Stoneham的一家醫院出生,當時負責接生的,是一位完全沒有種族歧見、老實親切的醫生。Dr. Lynn,這個名字還深烙在我腦海裡,任何人看到他,都會下意識地覺得他是個善良的好人。生第二個小孩時,被一位多慮的醫師要求剖腹產,Dr. Lynn卻認為剖腹產後仍然可以自然分娩,而引導我們進行無作為的順產,在分娩過程中,還體貼地讓丈夫能夠同時在旁守護。

託那位醫生的福,我才能親眼目睹彌陋吸入這地球空氣的那一刻,她馬上被我抱在懷裡,此時有神奇的事情發生了!那真是件神奇的事。就在我抱她的瞬間,她睜開了細長的瞇瞇眼,對著我微笑。她因為我抱著搖晃就笑了起來,所以她是對我行為的反應而笑的。當我描述這過程時,所有人都不相信我的話,大家都說那是我自己解讀的表情,並非真正的笑臉,那只不過是個自然的表情罷了,才出生沒幾分鐘的小嬰兒怎麼可能會笑。但對我來說真的很神奇,彌陋真的看著我笑了,那的確已是能清楚表現喜怒哀樂的小臉蛋,我當下認為她一定會是個感性十足的孩子,更直覺她長大一定很漂亮!對一個初生的小嬰兒是無法評斷美醜的,但我確信她將會是個有魅力的美人兒,當時我真的是如此奇妙地感受著。

老子曾說:「天下皆知美之爲美,斯惡已。」這句話是指,天下人所認為的美就是醜的意思。老子的智慧其實深植在我們東方人的生活習俗裡,因此愈是漂亮的小孩,愈會給她取卑賤或不討喜的名字,這樣才不會被貪圖美色的鬼怪給抓去,以避免所謂的「美人薄命」。

我太太曾經很擔心我會給她取了過度哲學意涵的名字,也希望我不要用光山金氏的輩分用字;由於我太太是研究中國古代音韻學的學者,她說名字一定要好唸又好聽,想著想著就問我「MIRU」這個高句麗王族姓氏之一的古語名字如何?我聽了立刻說好。因此MIRU的名字是先決定發音,後來才決定漢字的。我當時想起了「彌勒」的「彌」字,雖然它有著與弓箭相關的意思,但也有著「更加」的副詞含義,而「RU」若附予「陋」這個漢字的話,合起來的「彌陋」兩字就是愈活愈簡陋的意思。所謂「正言若反」,反過來說,這名字其實內涵了美好人生的深意。

彌陋從小就展露了她對繪畫的潛力。還記得在她兩三歲時,我不經意發現了她在我書上的塗鴉,因為畫得太好太讓我感動,我竟忘了該罵她。小學時候彌陋的畫畫也很受歡迎,她的畫常被展示在梨花女大附屬小學的走廊上,尤其彌陋善於繪畫動物,她能將動物活動的樣子畫得栩栩如生。其中曾有個作品是描繪著飛翔在天空的數十隻白鷺,整幅畫表現地多麼自由奔放並充滿活力,那開展的雙翅、向上挺立的頭部及奮力伸展的雙腳所呈現的律動,就像是生命飛躍的華嚴世界。只是不幸的是彌陋的作品都沒有留下來,我母親很愛彌陋的作品原本都交由她來保管,但卻在母親過世後東西都遺失了,實在相當可惜。

我是在當了哲學教授許久之後開始學醫的。當時年紀已經不小,愈學習卻愈感受到醫學這門學問的魅力,所以我建議彌陋去念醫科,即使將來不當醫生亦無妨。只是彌陋在就讀醫學院預科時看來壓力很大,最終她還是選擇了換跑道,改讀美術研究所。彌陋一直很喜歡畫動物,甚至還曾經養過幾隻白老鼠來當作繪畫用的模特兒,邊養邊研究老鼠的生態。不知是不是遺傳到我的關係,彌陋很愛讀書,也喜歡深入鑽研多項事物,更喜愛去實際應用體驗自己所研究的知識,於是彌陋探聽到老鼠最多的地方是曼哈頓下水道,她爬進了地下道出水口,開始調查老鼠大量群居的下水道環境。

因而彌陋對大都市的地下世界大開了眼界,同時領悟到了需要地下世界才能回到地上都市的道理。Jacques Lacan(1901~1981)曾做了有名的命題:「無意識是他者的論述」( The Unconscious is the Discourse of the Other)」,而彌陋發現,地下世界是從地上都市淪落的個體隱藏的無意識世界。她想展現出那地下世界的論述,所以用相機拍攝了下來。
只是在那幽暗的隧道內,不管拍攝再好,照片裡總是缺少了什麼東西,無法捕捉出那富含生命力的無意識論述。因此彌陋把自己的裸體加了進去。

很多人問我,「你們家是傳統的書香門第,女兒用裸體從事藝術活動,難道你一點都不在意嗎?」但彌陋並非只是用自己身體去單純表現裸體,那是用一個原始的生命體,將太古的無意識世界賦予生命力的象徵。一個人有著生命力的這個事實可以活用成為藝術媒介,這絕非只是人為的反逆行為。彌陋的這個舉動,在那些探索都市地下世界的人們之中成為了一個「傳說」,也成為了「紐約時報」所注目的焦點。最後這個傳說以「裸城的憂鬱」為主題展示在世人面前。

彌陋的第二個作品把自己身體丟進了豬圈裡。要拍攝豬隻之前,她先大量地研究了豬的生理與生態,然後用裸體在豬圈裡體驗了和豬在一起的生活。想到在豬圈裡的女人,或許中國人會聯想起被漢高祖劉邦夫人呂太后奸計所害的戚夫人的悲劇,然而彌陋想表達的是,橫渠在《西銘》中所述「乾稱父,坤稱母,民吾同胞」、其中「同胞」的擴大延伸。「豬和我絕非是疏離的兩個他者」,在那樣生命一體感的理念下,她認為必須重新省思二十一世紀人類文明的樣貌。笛卡兒有句名言「我思故我在」,彌陋拒絕了以那種存在依據的單純思維;以排除那種延長的實質思維的大前提,雖然建構了文明,卻也正在毀滅著人類自己,因此彌陋辯說:「豬在故我在!」如同伊斯蘭教徒不吃豬肉,自有其生態論上的理由存在。

而這次彌陋去了沙漠。駱駝是種善良的動物,有著壯碩身軀卻不會傷害人;討厭Thomas Hobbes(1588~1679)所說「一切對一切的戰爭」的惡循環,他們渴望和平且不斷地被驅趕,而能在沙漠如此荒涼、極度惡劣的生活環境下生存下來,他們讓生物生理層面的智慧不斷進化,同時在佈滿風沙的孤獨中發現了生命的歡喜。而人類依存了駱駝這個生命體,才能在險惡沙漠中平安生存,進而發現這塊生活的場域。在沙漠裡駱駝與人類的這個生命共同體中,彌陋發現了反文明的智慧,一個沒有發展、剝削、壓迫、疏離的荒漠生活場域!雖不同於釋迦牟尼所追求的解脫、往生而究竟涅槃的生活,彌陋卻在那裡發現了涅槃。

彌陋的每個專題各自在相當偶然的情況下展開,然而其中似乎仍有其關聯性。那關聯性的主角,我想稱之為「無為」。人類在優勢文明下產生了優越感,卻無意願對無為的反文明深入洞察和具備感情的話,人類終究缺乏正義的生存之道。就像我取的名字一樣,彌陋正在走向醜陋,背向人們所感受到美麗的世界,漸漸深入那反面的意境。老子曾說:「為學日益,為道日損。」彌陋的藝術所追求的境界並非「益」而是「損」,我祈願有一天,我們都能以「無為」為基礎,而在「低混沌性共同體」(the community of low entropy)中攜手相遇。

中譯:吳姵靚,校訂:朱立熙

나의 딸 미루의 예술세계

도올 김용옥

자기 딸이라고 해서, 반드시 아버지가 그 딸의 정신세계를 잘 아는 것은 아니다. 미루는 우리 다섯 식구 중에 막내둥이다. 미루는 내가 미국 하바드대학에서 유학하던 중에 보스턴 지역 스톤햄Stoneham의 한 병원에서 태어났는데 담당의사가 인종편견이 조금도 없는 무던하고 친절한 휴매니스트였다. 닥터 린Dr. Lynn이라는 이름으로 내 뇌리에 남아있는데, 그냥 쳐다보기만 해도 하염없이 선량한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둘째 아이를 낳았을 때 좀 거친 의사에게 걸려 곧바로 개왕절개를 했어야 했는데도, 닥터 린은 개왕절개 후에도 자연분만이 가능하다고 하면서 작위作爲가 없는 순산順産을 유도해주었다. 그리고 분만과정을 남편이 지켜볼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미루가 이 지구상의 대기를 들이마시는 첫 순간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곧 내 품에 안겼는데 아주 신비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사건이었다. 미루가 내 품에 안기는 순간, 아주 가느다란 실눈을 뜨면서 나를 보고 빙그레 웃는 것이다. 내가 도리도리 하면서 웃기니깐 그 나의 행위에 반응하면서 웃는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하면 이 세상 누구든지 내 말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해석한 표정이지, 웃음이라 규정지을 수 없는 생리적 표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생후 몇 분도 안되는 갓난애기가 웃는다는 것이 말이 되냐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진실로 신비로운 사건이었다. 미루는 나를 보고 웃었다. 분명한 희노애락의 감정이 표현된 얼굴이었다. 나는 미루가 매우 감성이 풍부한 아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확신한 것은 미루가 정말 미모의 개체가 될 것이라는 직감이었다. 생후 몇 분 안된 아이를 보고 미•추를 논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미루가 정말 매력있는 예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신비로운 교감의 체험이었다.

노자는 세상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곧 추함이라고 말했다(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이러한 노자의 지혜는 우리 동방인들의 생활습속에 깊게 배어있다. 그래서 예쁜 아이일수록 그 아명兒名은 비천卑賤하거나 미운 이름을 붙인다. 그래야 귀신이 탐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의 액을 땜질하려는 것이다.

아내는 내가 너무 과도하게 철학적인 이름을 붙일까봐 걱정했다. 그리고 광산김씨光山金氏의 돌림자를 쓰지 말자고 했다. 아내는 중국 고대의 발음체계를 연구하는 성운학자였기 때문에 우선 발음이 간편하고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구려 왕족의 이름 중에 “미루miru”가 있는데 그런 고어로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나는 좋다고 말했다. 그래서 “미루”는 발음을 먼저 정하고 글자를 나중에 결정한 것이다. 나는 “미륵彌勒”의 “미彌”가 먼저 생각이 났다. “미”는 활과 관련된 의미가 있지만 “더욱더욱”이라는 부사적 의미가 있다. 그래서 “루”를 “陋”로 하게 되면, “미루”는 살면서 점점 더 누추陋醜해진다는 의미가 생겨난다. “정언약반正言若反”이라고 했으니 아름다운 삶에 대한 반어적反語的 내함內涵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미루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천재적 소질이 있었다. 두세 살 때에 내가 서재에 펼쳐놓은 책 위에 우연히 그려놓은 미루의 낙서를 보고 하도 감동을 받아 야단치는 것을 잊곤 했던 기억이 있다. 국민학교 때도 미루의 그림은 인기가 좋았다. 미루의 그림은 이화여자대학교부속 국민학교 복도에 자주 걸려 있곤 했다. 미루는 동물의 그림들을 잘 그렸는데 그 움직이는 모양들을 너무도 자유자재롭게 표현했다. 하늘에 수십 마리의 백조가 떠있는 그림을 그린 것이 있었는데 그 표현이 어찌나 자유분방하고 다이내믹 했던지 그 펼친 날개와 치솟는 머리와 뻗친 다리의 선율들은 엘랑비탈의 화엄세계였다. 그런데 불행하게 이 그림들은 하나도 보관된 것이 없다. 나의 모친이 미루 그림을 너무도 사랑하여 보관하고 계셨는데 돌아가시는 통에 모두 분실되고 말았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나는 철학교수 노릇을 한 후에 뒤늦게 의과대학을 다녔다. 나는 늦깎이로 의학을 공부하면서 의학이라는 학문에 엄청난 매력을 느꼈다. 그래서 미루 보고 의학을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의사 노릇을 안 해도 좋으니까 그냥 교양으로 의과대학을 나오라고 했다. 그래서 미루는 프리메드 코스를 밟았는데 의대 공부가 너무 숨막히는 것 같았던 모양이다. 미루는 끝내 미술대학원으로 적을 옮겼다. 미루는 동물 그림을 계속 즐겨 그렸다. 그러다가 미루는 흰쥐 몇 마리를 그림 모델로 키웠는데 쥐를 키우면서 쥐의 생태에 관하여 많은 공부를 했다. 미루는 나를 닮아서 그런지 독서를 즐기고, 어떤 주제를 깊게 탐구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 주제에 관한 지식을 실천적으로 실험해보기를 좋아한다. 미루는 쥐가 많이 사는 곳이 맨해튼의 하수도라는 것을 알아내고 맨홀구멍으로 기어들어가 쥐들의 엄청난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는 하수도의 환경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미루는 거대도시의 지하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지상의 도시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지하의 세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지하의 세계에는 우리가 망각한 도시의 역사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은 “무의식은 대타자大他者의 담론이다The Unconscious is the Discourse of the Other”라는 유명한 명제를 발했는데 미루는 지하세계야말로 지상의 도시에서 미끄러진glisser 시니피에signifié들이 숨어있는 무의식의 세계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미루는 그 지하세계의 담론discours을 그려내고 싶어 사진을 찍어댔다. 그런데 그 어두컴컴한 터넬 속에서 아무리 멋있는 사진을 찍어도 무엇인가 공허했다. 살아있는 무의식의 담론이 포착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루는 자기 알몸을 오브제로 사용했다.

많은 사람이 나 보고, 당신네와 같이 유서깊은 사대부가의 적통을 가지고 있는 집안의 딸이 나체로 예술활동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 않냐고 묻곤 한다. 그러나 미루는 자기 몸을 나체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원시적 생명체, 그러니까 태고의 무의식세계를 활성화시키는 생명의 움틀임의 상징으로서 던진 것이다. 한 인간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예술의 오브제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인위人爲적 반역反逆이 아니다. 미루의 활동은 도시의 지하세계를 탐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의 “전설legend”로 알려졌고, 그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뉴욕타임즈』의 전면 포커싱을 받게 된 것이다. 그 전설은 결국 “나도裸都의 우수憂愁Naked City Spleen”라는 대규모 전시가 되었다.

미루의 두 번째 작품세계는 돼지우리 속에 던져진 미루의 몸이다. 미루는 돼지를 찍기 전에 돼지의 생리와 생태에 관해 깊은 연구를 했다. 그리고 돼지우리 속에서 나체로 돼지와 더불어 사는 체험을 했다. 중국인들은 돼지우리에 사는 여인을 생각하면 한고조 유방의 부인 여태후呂太后의 간악함에 희생된 가련한 척부인戚夫人의 비극을 연상할지도 모르겠다. 미루의 관심은 궁극적으로 횡거橫渠가 『서명西銘』에서 웅변한 바, “건칭부乾稱父, 곤칭모坤稱母, 민오동포民吾同胞”라 말한 “동포同胞”의 외연外延을 확대하고자 한 것이다. 돼지와 내가 결코 소외된 타자가 아니라는 것, 그러한 생명일체감 속에서 21세기 인간문명의 모습을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사유cogitans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존재한다고 말했지만, 미루는 그러한 존재의 근거로서의 순수사유를 거부한다. 그러한 연장延長을 배제한 실체적 사유의 대전제가 문명을 건설했지만 인간을 파멸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미루는 항변한다: “돼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나 또한 존재한다The Pig That Therefore I Am.” 이슬람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안 먹는 것은 그 나름대로 생태론적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요번에 미루는 사막으로 갔다. 낙타는 착한 동물이다. 거대 몸체를 가지고 있지만 남을 해칠 줄을 모른다. 그래서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가 말하는 약육강식의 악순환이 싫어서, 그는 평화를 갈망하며 쫓기고 또 쫓기어 갔다. 그리고 사막이라는 황량한, 최악의 생명의 조건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생리적 지혜를 진화시켰다. 모래바람만 이는 고독 속에서 생명의 환희를 발견한 것이다. 이 낙타라는 생명체에 의존하여 인간은 사막에서 평화롭게 생존할 수 있는 새로운 생활生活의 장場을 발견했다. 사막의 낙타-인간 공동체 속에서 미루는 반문명反文明의 지혜를 발견했다. 발전과 착취와 억압과 소외가 부재不在하는 황막한 삶의 장! 그곳에서 미루는 싯달타가 추구했던 해탈, 죽음으로서의 열반이 아닌 삶으로서의 열반을 발견했을 것이다.

미루의 테마들은 매우 우발적으로 전개된 것이지만, 그 나름대로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주제를 “무위無爲”라고 표현하고 싶다. 진실로 인간이 유위적 문명에 대하여 자부감을 갖는 것만큼 무위적 반문명에 대하여 깊은 통찰과 애정을 갖지 않는다면 인간은 이제 정의롭게 생존할 길이 없다. 미루는 내가 지어준 이름대로 날로날로 추해져갔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세계의 반면으로 점점 깊숙이 천착해 들어간 것이다. 노자는 말한다: “학을 행하면 매일매일 더함이 있지만爲學日益, 내가 말하는 도를 행하면 매일매일 손해만 본다爲道日損.” 미루의 예술이 추구하는 세계는 익益에 있지 않고, 손損에 있다. 그 어느 땐가 우리 모두가 무위無爲의 밑바닥에서, 저低엔트로피의 공동체the community of low entropy 속에서 손잡고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나는 빈다.